브런치북 남은자들 02화

경은 어디에 (2)

단편 소설

by 포도씨


‘같이 영화 한 편 보러 갈래요?’


문자가 와 있었다. 답장을 하면서 퇴근 준비를 하는데 대기석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선혜였다. 일을 마무리하고 선혜와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 관에서는 흔한 멜로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갑자기 웬 영화예요?


그냥 보고 싶어서요. 데이트도 하고요.


여름이 가까이 다가와서 그런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상영관 안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에 기대며 여느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흘러가는 영화 한 편을 봤다.


고마워요.


선혜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뭐가요?


나도 귓속말을 건넸다.


그냥. 다요. 결혼 전에도 우릴 많이 도와줬잖아요. 지금은 이렇게 내 남편이 되어주고, 우리 경은이 아빠도 되어주고. 당신이 있어줘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선혜의 눈에 약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영화 속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감정이 복받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극장가 식당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경은이는요?


오늘은 엄마 아빠가 데이트하러 나갔으니까 혼자 먹으라고 했어요.


아빠라는 말이 아직 낯설었다.


경은이는 아직 날 아빠라고 부르진 않아요.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불러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아니, 아니요. 물론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지만, 억지로 불러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알아요. 그리고 경은이가 신식 씨를 좋아하고 있는 건 제가 알아요. 아마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마음을 더 열어줄 거예요.


경은이가 날 아빠라고 불러주면 난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잠깐 고민이 되었지만 뭐든 어색할 것이다.


나도 할 말 있어요. 고마워요.


뭐가요?


내 가족이 되어준 것. 의지해준 것. 이쁜 딸을 만들어준 것. 다요.


돌아가기 전에 잠시 산책을 했다. 밝은 달 빛이 푸릇하게 올라온 길가의 이름 모를 관목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니 불은 켜져 있는데, 경은의 방이 닫혀 있었다. 선혜가 경은이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경은이 자니?


나는 살짝 돋아난 땀을 씻기 위해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후 나왔는데 집 안 분위기가 또다시 무거워져 있음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거실로 갔더니 경은이가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얘야. 괜찮니?


나는 경은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선혜가 경은이의 뺨을 때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


너, 여자애가 쌈박질이나 하고 다닐래? 진짜 너 뭐가 되려고 그래?


경은이는 선혜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맞고 온 거 안 보여? 싸운 게 아니라 폭행당한 거라니까!


무조건 피했어야지! 네가 대들었으니까 더 그런 거 아냐!


그럼 나한테 돈 내놓으라는데 어떡해? 내가 그냥 참는 게 맞는 거야?


자세히 보니 경은이 얼굴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것이 보였다.


선혜 씨! 지금 경은이 다친 거 안 보여요? 다친 애한테 손찌검을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너! 엄마한테 어디서 그렇게 대들어! 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데!


선혜 씨! 그만하세요!


아이, 시팔!


어머, 어머, 쟤좀 봐. 쟤 좀 봐요!


경은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일단 좀 진정하고 있어요. 내가 경은이한테 가볼 테니까.


나는 혹시 옷을 가볍게 입고 밖에 나간 경은이가 조금 추워할지도 몰라 서둘러 방에 들어가 외투 하나를 집어 들고나갔다. 경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경은이가 휴대전화는 가지고 간 것 같았다.


어디니?


집 앞 놀이터 벤치요…


편의점에서 초코 우유 한 팩과 맥주 한 캔을 사서 집 앞 놀이터 벤치로 갔다. 단발머리의 경은이는 짧은 팬츠에 반팔 차림만 하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의 밤이라 약간 쌀쌀한 것 같아서 내가 가지고 온 외투와 초코 우유 한 팩을 경은이에게 건넸다.


괜찮아?


어… 저도 맥주 사주지…


너 술 먹을 줄 아니?


아저씨, 다른 애들은 벌써 맥주 한 모금쯤 다 해봤을 거거든요. 저도 당연히 몇 번 먹은 적 있죠.


그렇구나.


하긴 이제 곧 성인이 될 나이였다.


아저씨. 아저씨도 제가 그렇게 잘 못 한 거 같아요? 그냥 돈 주고 조용히 지나가는 게 맞아요?


아냐. 용기 있구나. 경은이는.


그쵸?


경은이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아저씨 엄마랑 저 때문에 많이 불편하죠?


아냐. 다만 엄마랑 경은이가 조금 더 잘 지내면 좋지 않을까 생각은 많이 하지.


그게 불편한 거지. 피이.


그런가.


아저씨. 아마 그렇게 되긴 어려울 거 같아요. 그니까 그냥 포기하세요.


그건 왜 그렇지?


엄마는… 음, 나를 아마 인정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저렇게 나를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지.


난 조용히 경은이의 얘기에 집중했다.


엄마는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 내가 좋아하는 만화도 못 보게 하고,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했죠. 심지어 노는 것도 정해줬다고요. 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했어요.


경은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저씨는 내가 여자애 같아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가만히 경은이를 바라봤다.


솔직히 아저씨 눈에도 내가 보통 여자애 같진 않잖아요. 몸매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볼륨 따윈 안 키우고, 화장? 그딴 건 관심도 없어요. 긴 머리카락도 질색이고. 난 그냥 편한 게 최고란 말이에요. 그런 애한테, 아, 핑크 핑크 같은 게 어울리기나 하냔 말이에요. 내 방 봤죠? 와, 나한테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아세요?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고요. 옷도 다 치마에 원피스에… 바지 못 입게 하는 게 말이 돼요? 엄마는요, 좀 돌았어요.


어… 말이 좀 심한 거 아닐까.


아저씨도 이쯤 되면 알 거 아녜요. 엄마가 나한테 만큼은 미쳤다는 거. 그게 아니면 내가 미친 거라고요. 내가 엄마가 사준 물건들, 옷들 싫어서 어떻게든 용돈 모아서 사 오면 엄마는 화내면서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이유도 없이 그냥 갔다 버렸다고요. 그런데 사실 그런 건 별 것도 아니죠.


미쳤다는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화가 난 아이에게 네 말이 틀렸다는 얘기를 할 필요도 없었지만 확실히 일반적이지만은 않기도 했다.


그럼 어떤 게 제일 상처였어?


제가 어릴 적에요, 축구를 좋아했거든요? 동네 남자 애들이나 같은 반 애들이랑 어울려서 축구도 하고 그랬어요. 엄마를 아니까 엄마한테는 말 안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넘어져서 다치고 온 바람에 엄마가 내가 축구를 한 걸 안거예요. 그날 엄마는 동네 친구들, 같은 반 친구들 집에 전화를 걸어서 내가 축구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날부터 전 축구공엔 가까이 가지도 못했죠. 누가 날 껴주겠어요. 남자 애들은 절 멀리 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여자애들이랑 가깝게 지낸 것도 아니에요. 그냥 외톨이처럼 살았다고요.


여자애들이랑은 왜?


경은이는 또 머뭇거렸다.


음… 그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엄마는 나의 취향이라는 것을 모두 가져갔어요. 난 철저히 엄마의 인형으로 살고 있다고요. 난 졸업하면 집을 나갈 거예요. 꼭. 아빠가 살아 계셨으면 아빠한테 가기라도 할 텐데.


내 존재를 의식했는지 조금 멈칫하는 듯했다.


아, 나한텐 이제 아저씨가 있지. 아저씨. 그땐 아저씨가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나는요 무언가를 잃어버린 지 너무 오래됐어요. 이제 뭘 잃어버린지도 모르겠다고요.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어 미쳐버릴 거 같아요.


그래, 이 아저씨가 경은이 꼭 도와줄게. 그러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달 밤에 놀이터 벤치에 앉은 우리는 맥주와 초코 우유를 한 번 부딪히고 남은 음료를 모두 마셔버렸다. 성인이 될 경은이를 도와주는 약속의 의식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경은이가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 신경 쓰였지만, 경은이의 속 깊은 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경은이와 선혜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파악할 수 있었다.





경은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세금을 계산하기 위해 지출 내역 데이터를 조회하다가 내가 모르는 병원비 지출을 확인했다. 사용처를 알아보니 오래된 산부인과로 나왔다. 병원 지출은 월 1회 정도로 정기적이었다. 나는 가족 중 누군가 아프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선혜일까, 경은일까. 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혹시 경은이가 산부인과에 다니는 거면 한창 예민한 시기에 물어보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생각이 들다 선혜에게 따로 물어봐야겠다고 결론을 냈다. 경은이가 없는 늦은 저녁, 거실 소파에 앉아 선혜에게 물었다.


선혜 씨, 경은이나 선혜 씨 중에 아픈 사람이 있나요?


갑자기 그건 왜요?


아, 지출 내역을 살펴보다가 매달 병원비가 지출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요. 식구 중에 누가 아픈가 싶어서요.


선혜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 보였다.


음… 사실 제가 경은이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다니고 있어요. 경은이가 치료가 좀 필요해서요.


무슨 치료요? 어디가 아픈데요?


그게… 경은이가 생리를 안 해서 치료 중이에요.


생리를 안 한다고요? 생리 불순 같은 건가요?


경은이는 아직 한 번도 생리를 한 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3학년, 곧 성인이 될 여자 아이가 생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을 수 있는가. 몸에 큰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됐다.


언제부터 병원에 다닌 거예요?


초등학생 때부터요.


아니, 그때부터 치료를 했는데 아직도 그렇다는 건가요? 안 되겠네요. 병원을 찾아보니까 오래되고 작은 개인 병원이던데, 내가 내일이라도 대학 병원 알아보고 진료 잡아볼게요.


그건 안 돼요.


단호했다.


경은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나를 경은의 아버지로 인정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마음속에서 단번에 서운함이 올라왔다.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라도 해야죠. 그리고 신경 쓰지 말라니, 저도 경은이 아빠라고요. 부부로서 아이를 같이 키우는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튼 경은이 병원은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런 줄 아세요.


선혜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완고함과 고집이 경은이를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생각이 이어지니 경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경은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가까운 친구도 없이, 엄마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좌절하고 도망치고 싶었을까.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조차 잃어버리게 된 통제 속에서 만난 나는 경은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경은이 나의 자녀라면, 내가 그녀의 아버지라면 그녀에게 다시 스스로를 찾게 해주고 싶었다.




(계속)


3부는 https://brunch.co.kr/@grapeseed/164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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