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남은자들 05화

사랑의 맥박 (2)

단편 소설

by 포도씨

연애는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둘이 ‘머무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 감정 같았다. 우리는 그런 식이었다. 어디에도 적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공유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던 퇴근길이었다. 택시를 타기 애매한 거리,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가던 중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근처에 국물 떡볶이집 하나 있는데, 혼자 가긴 좀 아깝더라고요.”


그건 데이트 신청도, 초대도 아니었다. 그냥, 혼자 아깝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따라, 그와 함께 좁고 후줄근한 상가 지하로 들어갔다. 테이블은 네 개뿐이었고, 노란색 테이블보 위엔 물기 가득한 수저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수저를 꺼내 휴지로 닦았고, 나는 그 손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런 사람이구나.’


말은 많지 않지만, 작은 행동에 정성이 깃든 사람. 떡볶이를 다 먹고, 어묵 국물까지 마신 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 길을 걸어 나왔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회사 근처의 숨겨진 맛집들을 찾아다녔다. 고깃집의 계란찜 맛이 좋았다거나, 주꾸미집에선 항상 비닐장갑을 챙겨준다는 것.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며 식사하고, 조용히 계산서를 가져가 서로 눈치를 보다 한 번은 그가 먼저 말했다.


“이쯤 되면, 돌아가면서 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순간 그의 표정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비쳤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내요. 내일은 선배요.”


‘선배’라고 부르던 호칭은 그날을 기준으로 조금씩 어색해졌다.


한강은 언제나 우리의 피난처였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우리는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강변의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컵라면이요?”

“오늘은… 병맥주 두 개요.”


우리는 서로의 손에 쥐어진 맥주만큼이나 서로를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그는 맥주를 마시다 중간에 컥 하고 기침을 했고, 나는 괜히 물티슈를 꺼내 그의 손등에 묻은 거품을 닦아줬다. 그가 그 순간 나를 바라보며 말한 적 있다.

“요즘은 이런 시간이 가장 좋아요. 소란스럽지 않은 것들.”


그 말이 조금 슬프게 들렸던 건, 그가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 주말엔 영화를 보았다. 그는 늘 배우의 눈빛을 먼저 봤고, 나는 늘 스토리보다 음악을 먼저 기억했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늘 건 별로였어요.”
“왜요? 음악 좋지 않았어요?”
“OST는 좋았죠. 근데 대사가 이상했어요. ‘사랑이 나를 살게한다’는 그 말. 좀 뻔하잖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에 쥐어진 팝콘을 슬쩍 집어 먹었다. 영화관을 나오며, 우리는 언제나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감정을 나눴다. 내 쪽 어깨가 조금씩 그에게 기울고 있었다.


가끔 함께 지방 출장을 갈 일이 생기면 그는 트렁크 안에 여벌의 셔츠를 챙기면서 말했다.


“출장 뒤에 하루만 더 쉬고 가죠. 온 김에 좀 쉬고 오자고요.”


그건 사적인 부탁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사무적인 제안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출장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로컬 식당에서 청국장을 시켰고, 그는 꼭 밥을 국물에 말아 먹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여행이란, 이상하게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텔 TV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고, 편의점에서 고른 컵라면을 바닥에 놓고 함께 소파에 앉아 서로의 다리를 얹었다.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 우리가 서로에게 말 없이 기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에 그가 말했다.


“우리 요즘, 연애하는 거 맞죠?”


나는 잠시 멈칫하다 웃으며 물었다.


“그동안 아니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건 어떤 허락도,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었다는 조용한 확신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건’ 없이도 머무를 수 있었다. 시간은 고백 없이 흐르고, 사랑은 제 자리를 지키며 자랐다. 그는 늘 조용했지만, 나는 그의 고요함 속에서 나를 위한 자리를 하나씩 발견해갔다.


그를 알아갈수록, 나는 또 한 명의 그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의 그는 여전히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오후가 되어 사무실 공기가 무거워질 즈음이면 음료수를 돌리고, 프린트실에서 종이가 걸리면 조용히 일어나 해결해주는 사람이었다. 상사의 농담에는 적절한 웃음으로 받아치고, 실수한 후배에겐 “다들 그래요. 나도 어제 고객사에 자료 잘못 보냈어요” 하고 민망함을 덜어주는 사람. 한 마디로, 함께 일하기 좋은 동료였다.


그러나 퇴근 후의 그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었다. 말수가 줄고, 걸음이 느려졌다. 그와 나란히 걷는 퇴근길은 언제나 조용했다. 우리는 자주 말을 아꼈지만, 그에게 침묵은 공백이 아니었다. 그는 사소한 것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었다. 가로등에 비친 물웅덩이를 한참 들여다보다, “저거 약간 오로라 같지 않아요?” 하고 중얼댄다거나, 습기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이 냄새, 어릴 적 비 오던 운동장 같아요” 같은 말을 흘리듯 건넸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커피 맛보다도 “오늘은 햇살이 좀 투명하죠” 같은 말을 먼저 꺼냈다.


처음엔 그런 말들이 낯설었다. 나와 다른 시간 속에 있는 사람 같아서. 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사랑할 때, 그 순간을 감각으로 고스란히 담아두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부터는… 이상함보다 매혹이 앞섰다. 그는 공기를 기억했고, 향기를 간직했으며, 온도에 반응했다. 일상의 거의 모든 장면을 ‘느끼는’ 쪽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면서, 그가 보는 세상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의 말은 줄어들었다. 처음엔 피곤한 탓이라 여겼다. 일이 많아서, 혹은 감기에 걸려서. 그러나 점점 더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늦게 하거나, 아예 말 대신 조용히 내 손을 잡는 일들이 많아졌다. 핸드폰을 보다 말고, 멍하니 바깥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맛있다는 말 대신 “입 안에서 따뜻하다” 같은 표현을 썼다.


비가 오던 날, 우리는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걸었다. 그가 말했다.


“이 냄새, 알겠어요? 초등학교 운동장 끝자락. 벽돌담에 핀 이끼 냄새. 그 옆엔 자주, 누군가 버린 찐빵 봉지가 있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기억이 구체적일수록, 더 멀게 느껴졌다. 그는 덧붙였다.


“그런 냄새가 좋아요. 뭔가 오래된 것 같고, 사라질 것 같고.”


그 말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는 지금 내 옆에 있지만,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루는, 조용한 카페에서 그가 말했다.


“요즘은 그냥… 감각만 남는 느낌이에요. 눈, 귀, 피부. 그것만.”

“감각만 남는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내 질문에 그는 미소도, 설명도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가만히 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그는 감정을 말로 꺼내는 대신, 그 언저리에서 오래 맴도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아주 조용하게 저물고 있는 중이구나.’ 그건 어떤 병도 아니고, 명확한 상처도 아니었다. 다만, 누구보다 세상을 많이 느끼는 사람에게 가끔 찾아오는…피로감 같은 것이었다. 사랑이 그에게 쉼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더 깊은 수렁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이상한 침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편안함의 침묵이 아니라, 어떤 불가해한 간극 같은 것이었다. 그가 내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매일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문득 그가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의 허전함.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고 걸었고, 같은 집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어쩐지 ‘함께’라는 말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예전보다 더 많이 창밖을 바라보았고, 대화 중간에도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말없이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뉘고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다가도 불쑥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상태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살아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조금씩 꺼져가는 감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는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보다 감각으로만 서로를 확인하곤 했다. 나는 그 손의 체온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서 점점 유일한 확실한 것이 되어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는 자주 잠에서 깼다. 이따금 잠에서 깬 그가 조용히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보았다. 불을 켜지도 않고,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는 모습.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것을 보는 걸까.


하루는 퇴근하고 돌아와 함께 저녁을 먹다 말고,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끔, 정말 가끔…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누가 대신 연기하고 있는 느낌."


나는 젓가락을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지도, 피하지도 않은 채 내 시선을 똑바로 받았다. 그리고는 웃었다. 아주 슬픈 사람처럼. 그 웃음에 아무런 장난기나 따뜻함이 없었다.


나는 그날 밤 내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평온하게 자고 있었지만, 그의 숨소리는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나는 몇 번이고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잠결에도 내 손을 찾아 꼭 쥐었다. 그 작은 온기 하나에 안도하면서도, 그가 정말 멀리 가버릴까 봐 점점 두려워졌다.


우리의 대화는 점점 짧아졌다. 주말 아침, 함께 브런치를 먹으며 나눈 말은 고작 세 문장 남짓이었다. ‘계란 좀 더 익히지 그랬어요.’ ‘괜찮아요. 이게 딱 좋아요.’ ‘커피는 내가 내릴게요.’ 그리고 끝. 식탁에 앉아 있던 우리는 한참 동안 각자의 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불행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부엌에서 마주칠 때면 가볍게 어깨를 닿았고, 이따금 그의 품에 안기면 따뜻했다. 다만, 사랑이 균열 없이 계속되기엔, 그의 고요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오래된 앨범 하나를 건넸다. 그가 어릴 적부터 모아온 것들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손글씨로 적힌 짧은 시, 무표정한 얼굴의 흑백사진, 길가에서 주운 나뭇잎이 눌린 노트 조각들이 있었다.


"이거, 정리하다가. 그냥… 당신이 봐줬으면 했어요."


나는 그 앨범을 넘기며 천천히 물었다.


"왜요? 갑자기?"


그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그냥…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당신이면 좋겠어요."


그 말은 고백 같았고, 동시에 작별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말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가 살아온 시간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 속에는 그가 말하지 않았던 외로움이, 견뎌온 날들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 조용히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도 닿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그가 품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예감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가 나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을까 두려웠고, 동시에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밤, 그는 내게 등을 기대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살고 싶어서 사랑한 거였는데… 요즘은 사랑하니까 더 사라지고 싶어요. 이상하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등에 가볍게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살아 있게 하고 싶어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말하지 못한 그 문장이, 그날 밤 내내 가슴속에서 웅얼거렸다.




(계속)



3부는 https://brunch.co.kr/@grapeseed/167 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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