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한주소회 21화

대쪽 같은 가시나로 살으리랏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도

by 염미희

무엇도 쓰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왔다. 사실 며칠 째 다이어리에 적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몇 년 전 번아웃이 와서 퇴근할 때마다 눈물을 흩뿌리며 지내던 때에도 하고 싶은 건 있었는데 어제는 정말 운동도 하고 싶지 않아서 내내 앉아서 생각만 했다. 차라리 명상을 했으면 조금 더 생산성이 있었을까.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어 지내다 보니 확실한 순간들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노래들은 신나는데 마음에는 흥이 안 생긴다. 재미가 없다. 왜 재미가 없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누구를 마주치면 그냥 역겹다. 며칠 뒤 있을 약속장소에는 4시간 정도 일찍 가기로 했다. 박물관을 가서 머릿속에 다른 생각들을 집어넣어야겠다. 나는 올해 첫 노래로 질풍가도를 들었다. 그 노래가 나에게 가끔 힘을 준다. 눈을 감으면 자꾸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려는 것이었다. 되게 가볍게 이야기를 하면 마음까지도 가벼워지는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늘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을 해준다. 카페에 앉아 한 시간 동안 맞은편에 있는 식물만 쳐다봤다. 천장에 달려있는 조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마주하는 잎들은 반질반질 예쁜데 그 빛을 직접적으로 받지 못하는 잎들은 어둡다. 어느 부분은 까맣게 쪼그라들었다. 아래를 살짝 보니 새싹이 나있다. 새싹이지만 어느 부분은 약간 상해 보인다. 어떤 식물인지 궁금해서 사진을 찍어 이미지를 검색해 보니 개업하는 가게에 선물로 많이 주고받는 금전수라고 한다. 추론해 보건대 아마 이 카페가 처음 개업했을 때부터 있었을 식물이다. 화분을 본다. 청록색의 도자기를 본떠 빚어진 것 같은데 가로결이 깊게 파여있고 5줄 간격으로 여백이 있다. 미관상으로는 예쁘고 단정해 보이나 청소 측면에서는 효율성이 없을 것 같은 화분이다. 식물을 담기에 많이 작아 보인다. 화분의 둘레와 식물이 퍼져 올라오는 그 폭이 거의 비슷하다. 금전수.. 지금 나는 저 식물 같은 사람이다. 빛을 따라가지 못하고 빛에 의해 환하게 비친 곳만 요만큼씩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람. 보여줄 수 있는 순간들이 한정적이라 날 위한 상황이 만들어진 순간에도 설레는 마음이 앞서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는 그래서 기다렸던 순간들에 뭔가를 그르치는.. 내가 가진 능력은 분명히 더 대단하고 멋있을 텐데 짜인 작은 틀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 어떤 때에 저 금전수는 작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근데 그게 어떤 답답함인지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본능 덕분에 뭔가 답답한 기분은 있을 것이다. 그게 날 감싸고 있는 화분 때문인지 이 작은 카페 때문인지 자꾸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 때문인지 아니면 이 뜨거운 공기 때문인지 당최 무엇이 나를 답답하게 하는 건지 모를 것이다. 누군가가 분갈이를 제안한다. 아마 자라는 내내 저 화분이 전부였던 저 식물에게 분갈이라는 행위는 이질적이고 생경할 것이다. 사실 자라는 내내 분갈이라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다. 분갈이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또 새로운 화분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자신을 늘 감싸던 화분이 깨진다면 아마 식물로 살았던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늘 작은 식물인 줄 알아서 화분이 내 집이라고 생각하다가 깨어진 틈을 통해 조금씩 숨통이 트이면 아 그게 나에게 맞는 집이 아니었다는 것을, 살아가는 내내 깨닫게 될 것이다. 좁은 화분 속에서 생긴 상처는 과거의 영광으로 남겨둘 수도 있다. 아니면 홀로 있는 저 금전수는 봄이 뭐고 여름이 뭐고 가을이 뭔지 모르고 평생을 카페에서 지낼 것이다. 화분이 너무 좁아 속이 곯고 새로운 새싹까지도 썩어나가는 상황에서 무엇이 나에게 필요한지 몰라 언젠가 마주칠 누군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침잠되어 있는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그런.. 사실 L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 하고 싶은 것은 많고 두려운 것은 없는데 그냥 자꾸 더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요즘 세상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유지가 아니라 도태인 것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쉼 없이 오래 달려왔다면 페이스를 유지하지 않고 되레 조금 뒤로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조금은 든다면서. 내 앞의 금전수도 날 때부터 개업화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진 않을 텐데 결말은 금전수로 포장되어 문 하나를 두고 화장실 앞을 지키는 화분이 되었다. 금전수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결말은 나지 않았다고, 분갈이를 해서 더 좋은 주인을 만날 수도 있고 내가 우수하게 잎을 틔우는 순간 나를 봐줄 새로운 주인이 있지 않겠느냐고. 금전수 같은 삶을 살며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은 분갈이를 해줄 수 있는 주인을 만나거나, 우연히 좋은 싹을 틔어 좋은 자리에서 또 다른 꿈을 꾸는 것. 자꾸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든다. 그건 아마 사람이 가진 본능일 것이다. 내가 스스로 화분을 깨지 않는 이상 아마 나는 이 답답함을 이길 수 없다. 이기지 못한다면 수긍하고 새로운 싹을 어디에 틔울지를 고민하면 된다. 재밌게도 한 시간 전에는 바닥에 처박힌 기분이 들어 노래를 듣는 내내 답답했는데 이렇게 적고 다니까 현실이 보인다. 오늘 느낀 이 감정이 다시 찾아온다면 다시 이걸 보면서 나는 그래도 팔다리가 있으니 내 화분을 깨서 다시 만들 수 있지 않느냐며, 내가 빚어야 하는 화분이라면 진짜 멋있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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