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선생의 편지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01

by 나는일학년담임

1. 늙은 선생의 편지


제자들아. 어쩌다 보니 선생으로 먹고 산 지 서른 해가 넘었구나. 처음 가르친 제자들이 80년생이었어. 그 아이들 어릴 적 표정이 아직 눈에 선하구나. 바로 어제까지도 너희들과 한 교실에 있었나 싶은데, 시간이 활대처럼 휘어 나를 여기에 털썩, 던져 놓은 것 같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삼십 년을 살아 온 사람의 삶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오랫동안 신발을 만든 사람은 신발 바닥만 봐도 주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어떤 사람을 보고 그의 어린 시절을 알아맞혀야 하는데 아이고, 난 아직 멀었나 보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거든. 모르는 정도가 아니야. 난 아직도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지 의문이거든. 그전에, 과연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사람이 정한 규범을 부모 대신 가르치는 일, 그것도 아이들을 학교라는 공간에 가두고 야단까지 쳐 가면서. 사람들은 이런 걸 교육이라고 말하잖아. 미성숙한 내가 '교육'을 제대로 해냈을까? 그런 까닭으로 너희들에게 죄스럽다.


바람만 불어도 까륵까륵 웃던 초등학생의 너희가 벌써 마흔이 넘었다니 꿈같다. 마흔을 불혹이라느니, 경제적, 정신적 안정이 시작되는 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지. 하지만 그들의 마흔과 너희들의 마흔은 다를 것 같구나. 누군가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가혹한 마흔을 살고 있을 테니. 그런 너희 앞에 난 그저 막막한 선생이다. 좁고 불편한 교실에 갇혀 나와 한 해를 보내야 했던 너희가 나와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도 내가 꽤 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어떤 제자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야. 돈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다 보면 가끔은 삶을 지탱하는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잖아.


목숨을 끊은 제자 소식을 듣던 날, 앨범을 뒤져보았어. 예전 앨범의 맨 뒤 쪽에는 주소를 넣었잖아. 그 아이는 학교 후문 옆 버스 정류장과 붙어 있는 구멍가게에서 부모님과 살았더구나. 내가 출근 버스에서 내리면 입에 막 하드를 물고 운동장으로 뛰어가곤 했는데. 축구를 좋아해서 얼굴이 늘 그을렸고 말투가 야무지던 그 아이의 세상이 얼마나 고되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또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에 간 제자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아이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었어. 아이가 말없이 학교 다니길래 별 문제없는 줄 알았는데,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내도록 엄마라는 사람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불쌍하고 미안하다며 아이처럼 우셨어.


선생일 때 나는 교과서의 도덕과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어.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위인전을 읽게하고 사회 모든 구성원이 협력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도록 격려했지. 그렇게하면 너희가 잘 살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가르친 것들이 지금 너희 삶을 구하지 못하는구나. 그러면서 무슨 선생이라니. 이제 더는 선생 티 내지 않을래. 대신 교과 진도에 밀려 못 했던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너희들도 한 번은 지나갔을 열일곱 살 때 이야기를. 이것 또한 너희를 구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작은 위로라도 되지 않을까해서.




내가 열일곱이었을 때, 내 삶을 정의하고 안내하는 교과서나 선생은 없었어. 학교를 안 다녔거든.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어. '못 갔다'는 문장을 쓰자니 아직도 가슴 한 쪽이 아리는구나. 서울 변두리라고는 하지만 주공아파트와 연립주택에 둘러싸인 우리 학교에서 고등학교에 못 간 아이는 거의 없었어. 남들은 다 가는데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창피한 생각이 들었어. 다행스러운 건 우리 반 아이들 중 내가 고등학교 못 갔다는 걸 아는 아이가 없었다는 거야. 내가 고등학교에 안 가기로 한 게 겨울방학 중이었거든. 게다가 갑자기 일을 하게 되었지 뭐야. 그러니 개학때도 학교를 못 갔지. 졸업식에도.




2. 마이클 잭슨에게 진 신세


너희들은 중학교 갈 때 어땠니? 사실 난 중학교도 못 갈 뻔했어.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60여 명이 졸업했는데 몇 명은 중학교 공장으로 갔어. 여자는 가발공장, 남자는 구두공장으로. 공장에 다니다 영장에 나오면 군대에 갔지. 제대하면 정선이나 태백의 탄광으로 가거나 도시의 공장으로 갔어. 80년대는 우리나라가 제조업 하청으로 전세계의 주문을 받던 때였지? 노동력이 필요하다 보니 국가는 가급적 많은 노동자를 확보하려고 했어. 값싼 일자리도 넘쳐났지. 미성년자는 일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었지만 잘 지키지도, 지키나 감시하지도 않았어. 당연히 노동 착취도 많았지. 그 자리에 그들이 있었어. 성인 노동현장이 이랬으니 나이 어린 노동자들에게는 얼마나 가혹했을까.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 부모가 다들 그랬듯 우리 엄마도 나를 공장에 보내고 싶어 하셨어. 일찌감치 기술 하나 배워서 먹고살 궁리를 하라는 뜻이지. 공장 가서 일 잘하다 보면 기술을 배울 수 있을거라 생각하신 건 엄마 역시 공장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였을 거야. 나도 사실은 공장에 가고 싶었어.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에 간다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돈 벌어서 먹고 싶은 거 사 먹으라는 엄마 말을 들으니 끌리는 거야. 근데 학교 선생님께서 엄마를 설득하셨어. 어떻게든 중학교라도 마쳐주고 공장에 보내든 하시라고. 선생님이 남의 애를 끝까지 키워주실 것도 아니면서 공장 못 보내게 하신다며 어머닌 기분 나빠하셨어. 사실 나도 맛있는 거 못 사 먹게 된 건 좀 아쉬웠어.


그렇게 겨우 중학교에 갔단다. 돈이 없으니 버스는 못 타고 먼 길을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야. 춥거나 비올 때는 아주 괴로웠어. 집이 학교에서 멀어서 우비를 입어도 비가 스몄거든. 지각을 하면 교문에 엎드려뻗쳐서 빠따를 맞는 것도 무서워했어. 마포 걸레 자루로 휙! 소리가 나게 허벅지를 내려치는데 맞으면 내 몸이 끊어져 동강 나 버릴 거 같은 거야. 그 공포심에서 벗어나려고 죽어라 자전거 페달을 밟았어. 시계가 없으니 지각인지 아닌 지 알 수가 있나? 무조건 빨리 가는 거야. 학교에 도착해 자전거에서 내리면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몸이 붕 뜬 느낌이 곤 했어. 수업시간에도 딴짓을 하거나 질문에 답을 못하면 맞았어. 이 교실 저 교실에서 퍽퍽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났어. 그럴 때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 걸리면 맞는다는 생각에 이유도 모르고 움직였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교복 후크를 잠그고, 무조건 빨리빨리 움직였어. 그렇게 조심해도 맞거나 기합을 받을 때가 있었어. 친구들 중 누가 잘못하는 경우지. 그러면 책상에 올라가 머리를 박고 손을 등 뒤로 올려. 이마가 깨질 듯 아프지. 또 앞사람 다리를 내 어깨에 올린 채 엎드려 운동장을 기다가 쓰러져 맞기도 했어. 선생님들이 말했어. 엄살 피지 마. 니들 군대 가면 이보다 백배는 더 해, 새끼들아. 그럴 때마다 차라리 엄마 말대로 구두공장에 갔기를 바랐어. 괜히 선생님 때문에 이게 뭐야.


하지만 이런 생활도 얼마 못 갔어. 자식들은 점점 자라고 돈은 더 드는데 손바닥만 한 농사는 뻔하잖아. 결국 내가 중3으로 올라갈 때, 어머닌 시골을 떠나기로 결정하셔. 서울 장안동. 중랑천 뚝방 가 연립주택 지하 단칸방으로. 방에 서서 손바닥만 한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지나는 사람들 발이 보이는 방. 그 방에서 다닥다닥 붙어 자면서 엄마는 리어카를 구해 집 근처 골목길에서 호떡 장사를 하고 나는 신문배달을 하며 중학교에 다녔어. 서울에 처음 가니 참 좋더라. 더 이상 비 맞으면서 소 꼴 베러 안 가도 되잖아. 처음 보는 공중전화며 아파트도 신기하더라. 131번 버스를 타고 반 시간 정도 가서 미도파 백화점이 있는 청량리역에 구경가는 것도 좋았어. 홍수가 나면 중랑천에 돼지가 떠내려가던 모습조차 신기했어. 강원도 산골에선 상상도 못 하던 것들이었지.


당시는 우리나라 가난한 농부들의 이농이 잦았잖아. 특히 서울 변두리 가난한 동네엔 나뿐 아니라 전국에서 친구들이 모였어. 내가 전학 간 중학교도 그랬어. 열개도 넘는 반에 아이들이 가득했지. 강원도에서 온 촌뜨기와 누가 놀아주겠어? 자연스럽게 외톨이가 됐고 어둑한 지하 방에 혼자 있는 날들이 많았어.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들었지. 틀 때마다 마이클 잭슨이 나왔어. 나의 암울한 형편과는 달리 밝고 신나는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지금 처한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었지. 근데 또 내게는 기타가 있었어. 형이 교회에서 얻어다 놓은 통기타. 강원도 살 땐 꼴 베러 다니느라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서울에선 학교 끝나면 할 일이 없으니 일삼아 갖고 노는 거야. 노래 책에는 기타 코드 그림이 있지? 그걸 보고 코드를 누른 뒤 라디오에서 들은 대로 대충 손목을 흔들면서 쳐보는 거야. 은근히 재미있더라? 기타에 아주 푹 빠져 지냈어.


그 해 가을이었어. 학교에서 축제 때 장기자랑 대회를를 했어. 담임 선생님이 마침 음악 선생님이셨는데 우리 반에서 누가 나가겠냐고 물으시는 거야. 아무도 없으니까 그럼 혹시 기타 칠 줄 아는 애 있냐고 물으셔. 내가 손을 들었지. 그랬더니 나더러 나가래. 기타에 푹 빠져서 지내던 내가 못 나갈 게 뭐 있겠어? 당시에 라디오만 틀면 나오던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을 연습했지. 그 노래는 단순한 사박자 드럼이 기본 박자로 깔리면서 시작돼. 그다음엔 의미심장한 베이스 솔로가 나오지. 잠시 뒤엔 키보드가 나오고 바로 마이클의 보컬이 깔리는데 이 부분이 압권이야. 행사를 며칠 앞두고 선생님께서 친구들 앞에서 한 번 해보라고 하시더라. 연습한 대로 해 봤어. 기타는 그런대로 되는데 후렴 부분에서 목소리가 안 올라가는 거야. 아이들 앞이라 떨려서 그런 거지. 근데 너희들도 알지? 중학생들은 이럴 때 가만 안 있잖아. 어떻게든 이 노래를 같이 불러주는 거야. 다들 떼창으로 나를 도왔지.


Billie Jean Is Not My Lover

She's Just A Girl Who Claims That I Am The One

But The Kid Is Not My Son

She Says I Am The One, But The Kid Is Not My Son


이 부분 말이야. 또 그때 브레이크 댄스가 유행이었잖아. 몇몇 친구들은 춤도 췄지. 그렇게 장기자랑에 나갔고, 우린 한 판 잘 놀았어. 한동안 그 노래가 우리 반에서 울려 퍼졌어. 나는 매일 기타를 들고 학교에 갔고,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랑 노래를 불렀어. 마이클 잭슨, F.R. 데이비드, 스콜피온스, 스모키, 사이먼 앤 가펑클... 아이들이 나더러 짜식, 기타 좀 치는구나, 추켜올려주면 우쭐했어. 팝송을 부르다 보니 가사 내용도 궁금해졌어. 모르면 폼이 안 나잖아. 직접 사전 찾아가면서 해석도 해 봤어. 기타를 치면서 나랑 비슷한 취미를 가진 다른 반 애들도 알게 됐어.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정했고 연습 했지.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불렀어. 누가 기타 코드와 가사를 외워 부르나 경쟁하곤 했어. 친구들보다 한 곡이라도 더 외우려고 학교 오가는 길에도 중얼거리며 외웠어. 친구들도 수시로 노래를 청했어. 기타 치는 거 보면 신기하잖아. 그럴 때마다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다리를 척 꼬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시기 나의 인정 욕구는 꽤 높았었나 봐.


그런데 신기해. 기타를 치면서 어둡고 우울하던 내 표정은 사라지고 심지어는 있는 줄도 몰랐던 유머까지 지닌 나로 바뀌어 간 거야. 감성이 풍부해지는 시기라 그런 걸까? 지금 같으면 민망해서 못할 텐데 그땐 서슴없이 앞에 나가 노래를 했어. 살아가면서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지 몰라. 너희들도 그럴 때를 지나갔을 거야. 앞으로 올지도 모르고. 그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손 끝에 남아 있어서 가끔 기타를 끌어안고 낑낑대곤 해. 그때처럼 손가락도 안 돌아가고 가사도 다 까먹고 창법도 뽕짝 풍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속엔 그때 그 까까머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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