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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여덟째 날, 어쩌다 무전취식하다

by 다정 Jan 24. 2025

'늦잠을 자도 괜찮다.’며 잠들었지만 생각보다 이르게 눈을 떴다. 선택지로 고려하지 않았던 8시 반 요가를 가도 될 시간이었다. 요가 매트 대신에 사용할 수건 두 장과 선글라스까지 야무지게 챙겨 하버브릿지 아래로 향했다. 빠르게 걸으면서도 뉴질랜드와 너무 다른 풍경에 계속 카메라를 켜게 되었다. 건물 양식이 특이했는데 건물이 틈 없이 붙어 있고 여기는 유럽, 저기는 미국 같았다. 슬쩍 천문대를 들렀는데 보라색 자카란다가 예쁘게 피어있고 저 멀리 바다와 하버브릿지가 보여서 단박에 왜 유명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요가하는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다. 우리는 맨 뒷 줄에 섰는데 오빠가 수건 한 장은 너무 작다며 본인은 기다릴 테니 내가 두 장을 다 쓰라고 했다. 짧은 순간에 오빠가 배려해 주는 건지 하기가 싫었던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이유든 버벅거릴 시간도 없어 알겠다고 했다. 자리를 펴보니 실제로 수건이 내 예상보다 더 작았다. 한 시간 동안 밖에서 나를 기다릴 오빠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이 시간을 더욱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잔디 위에서 호흡에 집중하며 요가하니 호주의 땅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고 호주에선 별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이유 없는 강한 믿음도 들었다.


요가를 끝낸 뒤, 아침을 고민하며 걷다 보니 풍경이 어딘가 익숙했는데 우리가 있는 곳이 ‘더 록스’였다. 더 록스는 근현대 느낌이 나는 거리인데 스냅촬영을 알아볼 때 배경으로 많이 봤던 동네였다. 조금 더 걸으니 한창 준비 중인 플리마켓이 보였는데 찾아보니 일요일마다 열리는 록스마켓이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이벤트라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게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플리마켓의 시작 부근까지 내려가니 작은 카페 부스에서 음료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도 커피 수혈이 급해 아메리카노 한잔을 샀는데, 작은 컵이 무려 8달러였다. 호주 물가가 이렇게나 비쌀 줄은 몰랐는데 다음 날 스냅작가에게 듣기론 플리마켓 한정 관광객 대상 물가였다. 역시 어딜 가득 관광객 물가가 가장 비싼 법인가 보다. 


마켓이 시작할 때쯤 처음부터 눈여겨봤던 터키 도넛과 터키 커피을 샀다. 아니다 못 샀다. 도넛과 음료를 받고 결제를 하려는데 와이파이의 문제인지 결제가 안되었다. 구경하고 다시 오겠다며 천천히 플리마켓을 한 바퀴 돌고 회오리감자까지 사 먹었지만 여전히 결제가 되지 않았다. 사장님은 우리가 이렇게 기다리는 것에 미안함을 표하며 그냥 가도 된다고 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도 달리 방안이 없었다. 발길 닿는대로 걸으려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가는 길에 ATM기를 찾아봤다. 어렵게 작동하는 ATM기를 찾았는데 20달러를 인출하는데 수수료가 15달러였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라 결국 무전취식을 하며 오늘 하루 사장님의 장사가 더욱 잘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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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스마켓에서 쭉 걸어 내려오니 바다 위에 크루즈와 건너의 오페라하우스, 저 멀리에는 페리들까지 보였다. 페리를 보자마자 오늘은 저걸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는 맨리비치! 유일하게 아는 페리 정거장이자 호주에 사는 한국 유튜버가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멋진 해변으로 꼽았던 해변이다. 시드니에선 페리도 대중교통이라 버스 타듯 교통카드를 찍었는데 타면서도 신기했다. 뷰를 위해 2층으로 올라가니 이미 바다 쪽에는 사람들이 다 앉아 있었다. 오빠랑 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호주 바다를 구경했다. 뉴질랜드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는데 호주의 상징인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한눈에 담아 좋았고 멀리 보이는 멋진 고층 건물과 요트 타는 사람들, 바다를 따라있는 작은 주택들까지 너무 이국적이었다.


맨리비치에 도착해서는 크고 넓은 바다와 자유롭게 태닝 하는 사람들, 서핑하거나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외국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서핑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가로등에 걸려있는 강아지똥봉투도 신기해하며 한참 걷다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어딜 갈지 고민하다가 건강하게 배부른 포케를 먹고 약국에 들렀다. 오빠의 구내염이 여행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는 중이다. 퀸즈타운에서도 구내염 연고를 샀는데 한국에서 오빠가 쓰는 페리덱스와 달라서 잘 낫질 않았고 이번에도 원하는 연고가 아니었다. 다른 상비약은 평소에 쓰지도 않는 걸 사 왔는데 평소에 쓰는 페리덱스는 왜 안 들고 왔을까 오늘도 역시 약간 자책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주택가를 걸었는데 삿포로에서도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로 다녔던 우리가 생각나면서 이게 우리의 여행 방식 같았다. 구경도 좋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하고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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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잠깐 휴식을 취했다. 저녁엔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보러 갈 예정이라 만두 같은 파스타를 해먹고 단정한 원피스로 옷도 갈아입었다. 우리가 볼 공연은 La Clique라는 성인용 서커스다. 잔인한 걸까 싶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섹시 서커스였다. 서커스가 어떻게 섹시할지 예상하지 못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보면서 깨달았다. 처음에 욕조에서 서커스를 하는 분은 단지 물만 많이 튀길 뿐이었는데 세 번째로 나온 팝콘걸은 온몸으로 팝콘을 만들었다. 온몸을 면도하거나 마술로 옷을 하나씩 벗는 무대도 있었다. 야하고 섹시한 분위기였고 나체로 서커스를 하는 게 당연한 공연이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만 동양인이었다.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행동해야지 싶었지만 티가 났는지 서커스 단원들이 우리에겐 장난을 치지 않았다. 성인용 서커스답게 무서운 부분도 있었는데 긴 칼을 목에 넣거나 불로도 묘기를 부렸다. 1열에 앉아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보는데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섭고 아슬아슬했다. 돌아가는 길에 신혼여행에서 누군가의 나체를 함께 본 것도 1열로 서커스를 본 것도 정말 잊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공연을 다 보고 나오니 선물처럼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어딜 보든 장관이었다. 모두가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고 나랑 오빠도 서로를 찍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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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이야기책 제작을 위한 질문>

Q. 이국적이라고 느꼈던 풍경은 무엇인가요?
Q. 숙소로 돌아오는 길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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