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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둔형 최작가 Sep 30. 2021

주말은 바쁘다

2021. 연습#6.(210930)

Die Grosse Angst (1918), Walter Gramatté

  나의 주말은 항상 바쁘다. 주중엔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취함과 동시에 오랜 시간 늘어져 있어야 하기에, 게다가 출근을 앞둔 새벽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뒤척이기도 해야 하니까. 금요일 밤부터 시작되는 내 주말은 아무리 긴 연휴가 끼어 있다 해도 매번 짧기만 하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주말이 시작되길 바라면서 월요일을 시작한다. 상쾌하지도, 의욕도, 그 어떤 즐거움도 없고, 온몸이 근질근질한, 아니 간질간질한 느낌만 가득하게, 아.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나 소 같은 가축 마냥, 질질 끌려가듯 출근길에 오른다.

 

  월요일엔 출근을, 금요일 저녁부턴 주말을. 어린이에겐 희망을. 동물에게 자유를. 쳇, 억지스러운 의미가 패턴을 이룬다. 그렇게 월요일이 시작되자마자, 언짢고, 금요일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주말을 꿈꾼다. 주말은, 일주일 단위로 재배치되는 삶의 목표이자 목적이고, 자체로써 ‘의미’가 있다. 말 그대로 난 요즘 주말을 위해 살고 있다.     


  어제도 열 두 시를 넘긴 시간에 맥주 한 캔을 '칙!' 땄다. 9시간 남았다. 요즘엔 딱히 책을 읽지도 않는다. 다시 칙!. 두 캔째에, 8시간 40분 남았다.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알고리즘이라고 하는 놈은 참 신기하다. 맥주를 소개하는 영상,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와인, 소주, 심지어 40도가 넘는 버번위스키까지 소개한다. 두 시가 조금 넘어서야 비로소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7시간 남짓 남았다.     




  “왜 아직도 안자? 출근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미안, 시끄러웠지?”     


  “어서 자, 벌써 두 시가 넘었어”     


  “어...”     


  거의 남지 않은 맥주가 캔의 중심을 불안하게 흔든다. 이제 7시간도 채 남기지 않은 시간 또한 내 주말을 흔들고 있다. 아내는 들어갔다. 나는 다시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삼켰다. 시원하지도 달콤이나 고소하거나, 뭐 딱히 맛이 있지도 않은 음료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셨다. 나에게 주말은 그런 의미다. 즐겨야 한다는 강박보단 ‘월요일’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보루에 가깝다.     


  나의 불면증에 거창한 의미가 있는 듯 꾸몄지만, 난 몇 시간째 몸을 뒤틀면서, 술을 마시면서, 하염없이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이제 세 시. 6시간. 게다가 한 시간 반 전에는 일어나야 하니까. 가만 보자, 한 네 시간 반 정도 남았다. 더 이상 술을 안 되는데 알고리즘은 이제 럼을 넘어 보드카까지, 이미 너무 늦었을까?


  불나방이 하루살이처럼 사라져선 안된다. 불 타오를지언정 잊히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요즘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나, 재해석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난 과연 자유로운, 자유의지를 갖춘 인간인가. 싶다.




  그땐 아마, 대체로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배낭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다. 나처럼 실행력이 떨어지는 이들에겐 낭만적인 동경에 불과했지만, 신기하게도 세상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낭 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이들이 고가의 가방을 준비했고, 딱 봐도 별 내용 없는 여행 가이드북을 영단어처럼 공부했다. 비슷하게 준비과정을 거친,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이. 날씨가 뜨거워지거나 반대로 차가워져 갈 때 즈음, 약속이라도 한 듯, 전국 각지에서 전국 각지로 흘러나왔다.

     

  난 떠나지 않았다. 그 당시 또래들의 ‘배낭’에는 참으로 다양한 의미가 혼재되어 있었다. 돈이 없다는 걸까. 아니면 무작정 걷는다는 말일까. 그렇게 몇몇, 아니 대부분의 지인들은 국토를 횡단한다고 했다. 그들의 여정은 종단에 가까운데도 횡단이라고 우겼다. ‘국토횡단’이 ‘안습’이나 ‘지못미’ 같은 유행어처럼 사용되었던 시기니까. 종으로 긋던, 횡으로 긋든 간에 오래 걷고, 어딘가를 갔다가 온다면, ‘횡단’이라고 했다. 여럿의 지인이 함께 하자고 했지만, 모두가 겪는 똑같은 추억이 굳이 나에게도 필요할까 싶었다. 난 매번 뜨겁고 추워지는 계절 마다 그들의 호의를 거부했다. 단호하진 못했는데, 어떻게 했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난 거절했다.


  더위가 식거나, 추위가 풀릴 때 즈음, 그러니까 환절기가 시작되면, 이윽고 판타지에 가까운 여정을 쏟아내는 영웅들이 등장했다. 반면에 여행을 완주하지 못한 이들은 침묵했고, 한 없이 부풀려지는 전설적인 영웅담에 음지로 내몰렸다.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는 점은 여행을 떠나지 않았던, 시도조차 하지 않은 내가 완주에 실패한 이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되고, 음지로 몰렸다는 점이다. 남들과 똑같은 추억을 남기기 싫었을 뿐인데, 나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는 무척이나 타의적이었다. 그렇게 나의 젊은 시절은 타의에 의한 패배자로, 음지의 역사로 남겨졌다.




  이제 새벽 4시, 5시간. 이제부터는 자야겠다는 조바심보단 어떻게 버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어제보다 내일에 가까운 시간임을 인지한 순간부터, 조바심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자야 할까 싶다가도, 일어날 자신이 없어 버티기로 한다. 투쟁을 통한 쟁취보단, 소심한 일탈과 순응에 길들여진 결과다.


  주중의 목적은 주말이고, 주말은 주중의 걱정으로 허비된다. 횡단이든 종단이던, 성공하지 못했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았든 간에 상관없이. 모두가 패자의 음지로 내몰렸던 젊은 날처럼. 완벽히 나를 배제한 타의적 결과가 자의적 선택에서 기인했던 상황처럼, 술 비린내 나는 주말의 여운을 담아, 또 다른 주말로 향하는 월요일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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