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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Feb 14. 2020

입사 후 포부

현대그린푸드 재경팀

현대그린푸드 재경팀

입사 후 포부 (500자)


꼭 그렇게 포부를 물어야 속이 시원했냐


취업은 기업한테 “나“를 파는 일이다. 그러니 오랫동안 안 팔리면 문제를 나에게서 찾는다. 어떤 게 부족했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삶 전체를 반성하게 된다. 왜 더 열심히 못 살았을까, 왜 학교 다니면서 멋있는 일 하나 못 해봤을까를 후회한다. 그러니 취업 준비기간과 자존감은 꼭 반비례한다.  


그러는 와중에 포부라니. 이 문항은 참, 지원자를 구차하게 만든다. 평소엔 쓰지도 않는 단어다. 누구라도 "어떤 포부가 있냐"고 물으면 징그러워서 소름이 돋을 거 같다. 아무튼 취준생은 을이지 않은가. 민망하다고 비워 둘 수도 없다. 뭐라고 답할까. 가장 빨리 출근해서 마지막에 퇴근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할까. 나는 아침잠도 많고 저녁잠도 많아서 그건 힘들 거 같다. 일과 삶의 균형보단, 일에 더 집중하겠다고 할까. 나는 거짓말하면 티 난다. 이건 면접 때 걸리려나.


이 질문은 구구절절 간절함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싫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고백했는데 "너랑 사귀면 뭐 해줄 건데?"라는 거 같다. 연애라면 그 순간 마음을 접겠지만 취준생은 못 그런다. 구체적으로 나랑 사귀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를 나열해야 한다. 집도 바래다주고, 비싼 선물도 사주고, 기념일은 다 챙기겠다는 다짐 비슷하게, 귀사에 어떤 인재가 되겠다고 적는다. 당연히 자소서는 붙는 것보다 떨어지는 게 많다. 게다가 간절하다고 합격되진 않는다. 그게 문제다. 붙는다면 그깟 알랑 방귀 열 번도 뀔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부분 떨어진다. 그러니 기업에게 열정을 보여줄수록 상처 받을 낙차만 커진다.


물론 취업 시장은 비대칭적이다. 좋은 기업은 적고 취준생은 많다. 게다가 지금 저 문항의 주인은 현대다. 좋은 회사 중에서도 좋은 회사다. 애초에 기업이 갑이니 내가 열심히 마음을 보여야 하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안다고 불편한 마음이 덜어지진 않다. 반박 못해서 더 기분 나쁘다. 하여간 질문이 기분 나쁘게 생겼다. "충성 충성"외칠수록 좋아할 건가?


 나는 글쎄 인생에 큰 포부가 없다. 내 집 마련 정도다. 이건 너무 큰 포부일까. 아무튼 삶에도 없는 걸 입사하겠다고 만들려니 글자를 채우기가 힘들다.


자주 떨어져서 모르지만, 좋은 답변엔 계획이 포함돼 있어야 할 것 같다. 간절함만 보이면 "일단 취업시켜주면 다 할게요"라는 구걸이지만 "이런 계획으로 귀사에 이익을 가져오겠습니다"라면 기업 입장에서도 뽑을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걸 알면서도 떨어지는 내가 바보지. 그러니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간절함과 계획이라니, 제곱으로 재수 없다.


과연 내가 현대그린푸드 재경팀에게 어떤 포부를 가졌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 취업할 의지가 없다면 물어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취업이 간절한 취준생이라 건방지게 묻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묻지 못할까. 아마 그건 을이 갑에게 물을 수 없는 불문율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


 어떤 질문은 위계를 갖는다. 그러니까 똑같은 질문이라도 갑은 을에게 물을 수 있지만, 을은 갑에게 물을 수 없다. 특히 개인적인 계획을 묻는 질문은 더 그렇다. 이건 꼭 기업 자소서 문항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어른들은 우리가 악당도 아닌데, 자꾸 계획을 궁금해한다. (채용 담당자도 어른이겠지) 고등학교 땐 입시 준비가 잘 돼 가는지를 묻는다. 대학교 들어가면 군대는 언제 갈 건지 묻는다. 졸업을 앞두면 취업은 언제 할지를 묻는다. 취업을 하면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집은 언제 마련할 건지를 묻는다. 어른들은 기자도 아니면서 자꾸 우리를 묻는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내 계획을 궁금해 하듯이, 내가 어른들의 계획도 궁금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결심과 함께 큰 고모부에게 "노후 준비는 잘 돼가고 있는지"를 물으면 뺨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큰 고모부는 다정하신 분이라 뺨은 안 때릴 거다. 그렇지만 아주 불쾌해하실 건 틀림없다. 애초에 계획에 대한 질문은 어른에게만 부여된 권한 같다. 특히 그것이 사생활과 관련하거나, 개인적인 질문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뭐 대기업 횡포까지는 아니어도, 이 문항 자체가 소소한 갑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입사 후 포부 항목에서 자주 망설였다. 그건 별다른 포부가 없어서기도 하지만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 부질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아들과 달리 나는 계획이 없다. 물론 나도 한 때는 열심히 일 년, 월, 주 단위로 계획을 세웠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계획의 가장 큰 오류는 시차에서 발생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계획은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를 결정짓는 일이다. 나는 남의 말은 잘 안 듣는다. 당연히도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니, 그 말도 잘 안 듣는다.


또 계획은 깡 마른 나무막대처럼 연약해서 작은 충돌에도 쉽게 부러진다. 그러니 뭔가를 계획하는 일은 많이 접어뒀다. 그 보단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 건지, 살면서 어떤 우선순위를 가질 건지는 자주 고민한다. 그건 “지금의 나“에 집중하는 자세다. 자소서 문항에서도 그 질문은 왜 물었는지가 이해된다.   


그래도 이 기업은 포부로 끝났지, 노골적으로 "입사 한 뒤 10년 뒤의 모습을 그려보라"며 계획을 묻는 문항도 많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10년 뒤에 자기네 회사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2010년에 짱짱했지만 지금은 별 볼일 없는 기업도 많다. 당신네 회사라고 10년 동안 짱짱할 건 아니란 말이다. 미래가 불투명한 건 회사나 나나 피차일반인데, 왜 불쌍한 사람들끼리 그런 걸 묻고 그러냔 말이다.


나는 이 문항의 평가 기준이 궁금하다. 당연히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이면 답변도 정량적으로 계산되겠지. 그렇다면 "입사 후 포부"라는 항목도 분명 평가자들의 공통된 기준이 있을 거다. 어떤 답변에 좋은 점수를 줄까. 간절함일까. 들어와서 일 잘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현실적이고 분명한 계획을 꺼내는 사람일까. 야망이 큰 사람일까.

 입사하려면 모범 답안을 적어야 한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빈 공간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보다 보면 물음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이 생긴다. 애초에, 이 질문이 필요한 질문일까? 이걸 왜 묻지?


오늘은 이 문항의 질문자에게 묻고 싶다. 이걸 왜 묻는지. 포부와 계획이 정말 인재를 선별할 때 중요한 문제인지. 혹시 실례가 안 되면 당신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귀사는 10년 동안 어떤 계획을 가졌는지. 이 질문의 평가기준은 무엇인지. 입사할 때 가졌던 포부와 지금의 당신은 얼마나 일치하는지. 묻다 보니 너무 열불 낸 거 같아 미안하다. 당신도 누가 시켜서 물어본 거겠지. 근데 진짜 모르겠어서. [3,140자]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팔로우를 하시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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