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실격 Feb 15. 2020

고객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킨 경험을 기술하여 주십시오

공항철도 사무영업팀

공항철도 사무영업팀

자신이 속했던 조직에서 고객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킨 경험을 기술하여 주십시오 [500자]


2017년, 휴학하고 여행 다니던 중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한인민박에서 스테프로 3개월을 머물렀다. 민박 일이 손에 익던 중이었다. 젊은 부부로 보이는 사람 둘이 체크인을 했다. 여권을 확인하니 삼십 대 중반 나이였다. 둘은 2인실을 예약했다. 이제 막 신혼이 지난 거 같아 보였다. 다음 날 조식에서 만난 둘은 아침부터 알콩달콩 했다. 보기 좋았다.  


싱거운 하루를 보내고 혼자 저녁 먹는 시간이었다. 부부가 일정을 다 마쳤는지 이른 시간에 숙소로 복귀했다. 때마침 부부도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 왔다. 우리 민박은 한 개의 식탁뿐이었다. 나는 나 대로 반찬거리를 꺼냈고, 부부는 장 봐온 음식을 꺼냈다. 아내는 파스타를 마치 라면 끓이듯이 손쉽게 준비했다. 오랜만에 4인 상 식탁이 꽉 찼다. 나는 내가 차린 음식을 권했고, 부부도 내게 음식을 전했다. 훈훈함이 오갔다.   


사람들은 20대 청년이 스테프로 일하는 거에 관심을 갖는다. 한국 사회란 모름지기 단계별로 밟아야 하는 코스가 정해져 있는데 “베네치아 한인민박 스테프”는 예외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못 참는 손님들은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됐는지, 한국에선 뭘 하는 사람인지를 물어온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 질문은 초면인 투숙객들과 가볍게 이야기하기 좋은 주제다. 나는 녹음된 자동응답기처럼 능숙히 대답했다.


가벼운 식사자리였던 식탁은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흔한 일이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비워진 술병이 늘어갔다. 술이 약한지, 남편의 얼굴은 오래된 와인처럼 붉어져 갔다.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어디 학교를 다니냐고 물어왔다. 나는 어느 학교를 다닌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전공을 물어왔다. 경영학과라고 답했다. 여기까진 자연스럽다. 이번에는 진로를 물어왔다. 나는 어떤 쪽을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공식적이던 질문은 점점 개인적인 질문들로 바뀌어 왔다. 첫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였으면 대화가 더 빨리 끝났을까.     


그래도 아무튼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고객이지 않은가. 나는 성실히 답변했다. 과는 이런 쪽으로 바꾸고 싶고 앞으로는 그 진로로 공부해서 밥벌이까지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 정도로 대화가 끝났으면 좋았을걸. 남자는 세계 경제 상황을 진단하면서 내가 소망했던 직종의 불투명한 미래와, 얼마나 불안정한 결정인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관련 회사들의 최근 주가 동향까지 친절히 찾아서 알려줬다. 물론 그 주식은 시퍼런 하락세였다.  


또한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중국어의 중요성과 복수전공을 생각해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과, 이공계의 중요성에 대해 교훈을 들었다. 지금 만났으면 프로그래밍을 배우라고 했을까. 그는 몇 가지 자신이 확신하는 신념들로 내 20년 삶을 손쉽게 평가했다.  


그는 완전히 대화에서 운전대를 잡았다고 생각한 듯 보였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베네치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해보려고 해도, 주제는 이내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로 넘어갔다. 독일 맥주가 맛있지 않냐는 질문엔 독일 자동차가 얼마나 우수한지에 대한 답변이 나왔다. 이래서 술 마시면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되나 보다. 그는 대화라는 도로에서 비틀비틀거렸다. 4인용 식탁에서, 이야기는 한 명만 했고, 듣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는 길을 잃고, 그는 나르시즘에 빠진듯해 보였다. 그나마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내가 대화를 궤도에 위치하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최소한 본인은  사태에 지분이 없다는  주장하고 싶다는 듯이 나에게 "이해해 주세요 우리 남편이 취해서"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남편은, 태만한 20 청년에게 현실을 일깨워야 한다는 사명이 완수되지 못한  보였다.  뒤로 30분은  기나긴 연설을 쏟아냈다. 모든 말을 마무리할 때쯤엔 나를 보면서 ", 조카 같아서 그래"라는 말을 남겼다. 그날  스스로 대단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숙면에 취했을 거다.


조금 삐뚤어진 성격으로 열심히 비꼴 수 있었지만, 민박집 후기를 위해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했다. 자본주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표정이 기관차의 동력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민박집이라는 조직을 위해서 최선으로 고객 요구를 만족시켰다. 이 정도면 공항철도 특급 인재상 아닌가?


그런데 세계경제의 흐름을 읽고, 한국 부동산 시장을 읽으며, 과학 서적을 읽는다는 사람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 표정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거는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는 대화에서 무얼 요구했을까. 적어도 그게 계몽이라면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나이 들면 안 된다는 걸 배웠으니까. [2,228자]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팔로우를 하시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https://brunch.co.kr/@jooho201/4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