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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Mar 20. 2021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여 개선했던 경험 중

SK 바이오사이언스 / 의약품 마케팅 영업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여 이전에 비해 조금이라도 개선했던 경험 중 가장 효과적이 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 방식을 시도했던 이유, 기존 방식과의 차이점, 진행과정에서 했던 행동과 생각, 결과에 대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십시오 (1000 자 10 단락 이내)


예전과 다르게,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것에 지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난해한 미술을 마주할 때, 그걸 이해 못하는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쪽은 "이 미술은 정말 위대한데 내 그릇이 작아서 이 고매한 예술을 내가 다 품지 못한다"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과,


"......옘병 이깟것도 예술이라고"하는 쪽이다.


예전에 나는 전자였다면, 지금은 옘병을 외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SK바이오사이언스 문항에 대한 내 답은, 내 감상평에 솔직해지면서 효과적으로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는 점이다


21살 처음 떠난 유럽 여행에서 유명한 박물관이라면 일단 찾았다. 특별히 예술적 교양이 있거나 보고 싶은 작품이 있던 건 아니다. 관람하겠다는 마음 가짐보단, 각 각 박물관 도장을 깨러 가는 선수에 가까웠다. 파리면 루브르, 런던이면 내셔널 갤러리, 이탈리아면 우피치 미술관 등등등이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도 참 의아하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좋아하지도 않는 미술관을 보려고 왜 그리 공 들였을까. 그 돈과 시간으로 펍에서 맥주마시면서 축구나 볼걸 그랬다. 그랬으면 최소한 지방이라도 남았을 텐데.

 

매번 원도 않는 전시를 보러 가는 길엔 여행책에 적힌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의 목차를 벼락치기하는 대학생처럼 읽었다. 역시 사교육의 민족다운 쪽집게 강좌였다. 박물관에 도착하면 지도를 보면서 그 벼락치기한 작품을 효율적으로 관람할 동선 만들었다. 그리시험장에 들어가는 것 같은 비장함으로 박물관에 입장했다.


내 관람 방식은, "최대한 많은 예술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수많은 방문객을 비집고 다니면서 한참 걸어 한 곳에 도착해 1분 정도 관람을 한 뒤에, 다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그건 마치 관람이라기 보단, 체크포인트를 점령하는 군인의 동선 같았다. 어떤 사람은 한 달 걸려도 부족하다는 루브루를, 나는 효율적인 동선과 기민한 움직임으로 2시간 만에 끝마쳤다. 뭔가 잘못됐다는 건 그땐 몰랐다.


한 작품이 내 발길을 1분도 잡지 못했던 건 당연하게도 그 작품들이 전혀 흥미롭지 못해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그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미술사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에겐 "중요한" 작품보단 "직관적으로 아름다운"작품이 더 발길을 잡았을 거다. 예를 들어 다양한 색을 사용했거나 사실과 비슷하게 그려내는 작품들 말이다. 만약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의 동선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위주로 봤다면 몇 배의 시간은 더 걸려서 관람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작품은 대부분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다뤄지기에, 쪽집게 목록에선 배제돼 있었다.


추상적이고 난해한 작품은 나를 1분보다도 더 빨리 이탈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이해 못할 어려운 작품들 앞에선 마치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준비를 잘하고 왔으면, 이 작품을 보고 감동했을 텐데"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해 못하는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위대하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그림 감상이란 정답에서 엇나가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북적북적하던 모나리자 앞에선 그 현타가 더 강다. 모나리자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서양 여자의 얼굴이다. 나는 최소한 모나리자 앞에선 감동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그림을 마주했을 때 느낀 건 고작 두 가지로, "사람 정말 많다", 와 "이 그림이 대체 어쨌다는 거지?"였다. 나는 정말이지 미술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위축됐다. 나는 여러 번 난해한 미술에 기웃거리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았다.


난해하고 복잡한 미술 작품을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던 태도는 단지 미술 작품 관람법에만 적용된 건 아니다. 나는 소위 어려운 영화나 난해한 문학, 추상적인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면 늘 위축됐다. 그 영화를 다 이해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아리송하수수께끼 같은 작품일수록 고평가 했다. 그만큼 내 예술적 교양과 안목이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사실 거짓 감상평이다. 어쩌면 다른 형태의 콤플렉스일 수도 있겠다.


"어려운 예술작품에 대한 거짓된 관람법"은 한순간 드라마틱하게 교정되진 않았다.


이해도 안 되는 예술 작품 감동하는 척도 몇 년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햇수가 지나고, 조금 더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관람할수록 내적 데이터가 축적됐다. 내가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구분 가능해졌다. 나는 가능한 솔직한 "내 언어"로 그 작품이 왜 좋고, 왜 싫은지를 말과 글로 기록했다. "누가 좋다고 했다 더"라, 또는 "어느 상을 받았다더라"와 같은 평을 최대한 거리 두었다. 오로지 내가 실제로 느낀 감상과 이해한 내용만큼만 설명하고자 했다. 정말 좋았던 어떤 작품을, 신뢰하는 평론가가 비슷한 감상평을 내놓성장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글과 말로 감상을 기록할수록, 작품에 대한 내 솔직한 입장 정리가 가능해졌다. 나는 더 이상 이해가 안 되는 홍상수 영화를 꾸역꾸역 보면서 훌륭한 작품이라고 믿 않게 됐다. 물론 그 감독이 "영화적으로 훌륭한 감독"이란 평을 받는 건 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동어 반복되는 듯한 그의 영화를 유쾌하게 못 보겠다. 그냥 내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

 이해가 안 되는 예술 작품을 보면서 자책하지도 않는다. 그 보단


"........ 옘병 이깟것도 예술이라고"(속으로 생각하면서) 지나간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논문처럼 읽으면서 이 작품이 왜 그렇게 훌륭한지 수고스럽게 찾지 않는다.


아직 홍상수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작품이 재밌지 못한 건, 내 경험의 데이터가 충분치 않아서일 수 있다. 혹은 데이터가 쌓인 뒤에도 여전히 재미없을 수도 있을 테고.


다만 분명한 건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작품들에,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작품을 깎아내리고 말지.    


여러분들도 나처럼 남들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이해 못하는 영화를 훌륭한 영화라고 평가했던 적이 있는가. 미술관에서 추상적인 작품을 마주할 때, 나와 비슷한 좌절을 느꼈던 적 있는가.

혹은 처음부터 "옘병 이깟것도 예술이라고"할 수 있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무엇이 됐든 스스로에겐 솔직한 감상평을 내리는 게 좋은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내 감정과 감상에 솔직하면서부터 조금은 더 성장하고, 조금은 더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다. [3,218자]


“필패하는 자소서”에선 자소서 문항을 제 맘대로 대답하는 형식의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진로 고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 부끄러움, 대인 관계 등이 키워드입니다. 기획 의도가 담겨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합니다. 팔로우를 하시면 글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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