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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Feb 26. 2024

625 전쟁 ⑧

할아버지 회고록 29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625 전쟁 ⑧



 그때가 53년 6월쯤 되었을 것이다. 여름이라 장맛비가 자주 내리고 후덥지근하게 덥다. 옷은 비와 땀에 젖어 계속 마를 새가 없다. 그때쯤 상황은 어떠했는가. 4월에 판문점에서 병상포로의 교환이 끝났고 휴전회담이 속행, 6월 4일 공산 측이 실질적으로 UN군 측 휴전제의에 전면적으로 수락하였다. 그리고 6월 25일 미 극동담당 차관보가 휴전반대 북진통일만을 고집한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회담 결과를 동의를 얻기 위해 소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이승만의 휴전반대는 완고했다 했다. 우리 민족의 살길은 오직 북진통일만이 있다고 외쳤다. 국민들도 이를 동조했으며 서울시민은 연일 데모로(휴전 결사반대) 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AM무전기가 있어 서울방송을 들을 수가 있었다. 휴전이 성립될 무렵이라 피아간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전 전선은 치열한 대규모적 전투가 연일 계속됐다. 중공군의 전술은 모택동 전술인 인해전술을 쓰고 있다. 공격 제일선엔 수류탄전으로 감행, 앞에 돌진하는 병사가 죽으면 시체를 딛고 넘어온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군의 병사들은 그 위세에 눌려버린다. 나는 무전기를 메고 지휘소(OP)와 같이 하기 때문에 항상 대대장과 행동을 같이했다(당시 대대장은 김중령(이름은 잊었음), 이북출신, 후에 논산훈련소에서 만남, 그때까지도 중령으로 25 연대 부연대장직에 있었다). 나는 대대장을 따라 야음을 이용 북한강변을 돌아 고지 하단에 대대 OP를 설치했다가 날이 새면서 고지정상으로 이동했다. 무전기를 메고 쫓아간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FM무전기인데(SCR-609) 무척 무겁다. 예비건전지를 함께 메니 무게가 30Kg가량 됐을 것이다. 장마 때라 비가 내리다가 금방개면 햇빛이 내리쪼이면 따가울 정도다. 그랬다가 또 금방 비가 내리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땀과 비에 젖어 작업복은 하얗게 소금발이 마치 지도를 그려놓은 것 같다. 신발은 훈련화를 신었기에 물과 땀에 젖어 질퍽하다. 고지에 올라 대대 지휘소(OP)를 설치, 연대와 교신을 마치고 전방을 바라보니 적진이 바라보였다. 포탄과 폭격으로 고지가 초토화되어 벌겋다. 피아간의 고지가 전부 그러했다. 치열했던 전쟁터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고지엔 나무하나 풀 한 포기가 없다. 중공군에게 빼앗긴 고지를 앞에 바라보고 계곡을 사이에 적과 대치하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고 목이 말라 물을 얻어마시기 위해 인접호에 갔다. 호안에는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불볕더위라 밖에는 쉴 곳이 없다. 고개를 뾰쪽 내밀고 물을 조금 달라고 했다. 안에서 한 병사가 나오는데 어데선가 많이 보던 얼굴이다. 자세히 보니 고향친구다(신기). 생사를 가름하는 전쟁터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반갑다. 소속이 어데며 어떻게 여기에 와있는가 물었다. 사단 공병대 소속인데 전방 지뢰매설작업하러 와 있단다. 우선 목마르니 물 좀 달라고 해서 물을 얻어마셨다. 나와는 별 친분은 없었지만 고향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데 반가웠다. 이곳은 전지라 오래도록 이야기 나눌 수 없고 곧 헤어졌다. 그런데 후에 알게 됐지만 그는 그곳에서 전사했단다. 졸병이라 지뢰매설작업 중에 전사한 것 같다(휴가 가서 그의 모친을 만났는데 나를 붙잡고 우는데 정말 안되었다. 나는 살아서 휴가 왔는데). 그리고 나는 OP로 가설병 한 사람과 같이 가는데 마침 그때 중대에 파견된 위생병 김중사를 만났다. 혹시 필요할까 해서 구급용 압박붕대를 하나 달라고 했다. 김중사는 앉아서 구급낭을 열고 나는 막 앉으려는 허리를 굽히는데 적의 직사포탄이 날아와서 바로 옆에 있는 호에 명중됐다. 그 호 위에는 12중대 통신병이 소대전화선을 가설하고 막 돌아와 호위에서 상의를 벗고 땀을 닦는데 명중폭발했다. 그 파편이 날아와 서있던 가설병의 왼쪽 어깨를 쳤다. 그리고 나의 왼쪽 팔뚝에도 모래알 같은 파편이 박혔다. 그리고 12중대 가설병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호 저 밑에 빨간 살덩어리만 남아있어 보였다. 그 찰나의 순간이랄까. 전쟁터란 바로 이런 것인가. 가설병은 급히 위생병과 함께 CP구호소로 후송되고 죽은 12중대 통신병은 그들 반장이 내려가 흙으로 덮어주는 것을 나는 봤다. 애처롭다. 나보다 어린 나이다(나는 22세). 그에 부모들은 무사히 살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빌고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나도 급했다. 통신대장에게 부상당했음을 보고하고 CP구호소 내려갔다. 그 당시에는 부상자가 하나 발생하면 서로가 부상자를 붙잡고 내려가려 한다. 잠시라도 전쟁터에서 피하려고. 나는 혼자서 내려갔다. 골짜기까지 내려갔다. 골짜기에서 강으로 흐르는 물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그곳은 적으로부터 노출된 곳이라 아주 위험한 곳이다. 건너가다가 집중사격을 받을지 알 수가 없다. 잠깐 멈추어 어떻게 건너가야 하는가를 살폈다. 바로 옆에 노무자가 밥통을 멘 채 죽어있었다. 머리를 맞아 죽은 지가 오래됐다. 엄지만 한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데 정말 못 볼 것이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온 남편이며 아버지일진대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햇빛이 쬐이니 시체의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찍찍 난다. 시체가 물에 붇고 살이 팽창되어 옷이 찢어지는 소리다. 이제 건너가야 하는데 용기를 내어 막 뛰었다. 점벙 점벙 물을 건너고 막 뛰었다. 건너가서 산모퉁이를 막 돌았다. 적의 시야에서 우선은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는 호가 하나 있었다. 잠깐 그 안에 피했다. 그 호는 전날밤 중공군 위생병과 아군의 병사가 동숙했던 곳이다. 아군의 병사가 지친 몸으로 호 속에 들어갔더니 정체 모를 군인 한 사람 자고 있었단다. 피곤해서 그 정체에 상관치 않고 쓰러져 잤다는 것이다. 새벽에 눈을 뜨고 보니 중공군의 위생병과 머리만 따로 했지만 잠자리는 함께 한 것이다. 너는 나의 적, 나는 너의 적이 었겠지. 물론 언어소통이 될 리 없겠지만 서로가 겁에 질려 눈치만 보다가 북으로 남으로 제갈길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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