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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대디 Aug 12. 2020

해외 프리랜서의 삶, 호주에 간 공고생 EP9

첫 리더와 프리랜서

첫 리더와 꿈을 향한 발걸음


2007년, 교회에서 방송팀 리더로 섬겨주신 신집사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리더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내가 방송팀 리더가 되었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나 영성으로나 함께한 다른 팀원 형, 누나들보다 내가 모든 면에서 미숙했지만 아무래도 방송국을 목표로 하고 있는 꿈과 비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보고 섬기게 되었다. 이제껏 교회 리더로서는 이 자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곁에서 팀원들이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임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동시에 영주권이 나왔고 이제는 나도 본격적으로 방송국이나 프로덕션 등 영상을 주 업무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런 계획이나 생각을 하지도 않고 하고 있던 일을 그만두었고 영상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이 결정은 대단히 무모한 결정이었는데 당시에 내가 교회방송팀 리더였고 매일같이 하는 기도가 방송국을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일화는 곳은 유학회사였고 점점 나이는 많아지고 마음이 급해서 환경을 바꿔버리면 변하지 않을까 하는 무책임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무튼 난 회사를 나왔고 영상 프리랜서가 되었다.

프리랜서의 삶


이 프리랜서로 전향한 것이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무책임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내 이름으로 작은 아파트를 대출받아 구입했지만 프리랜서의 들쭉날쭉한 수입으로는 턱없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호주로 광고 촬영이 꽤 있었을 때였는데 나는 현지 코디네이터, 프로덕션 어시스턴트, 메이킹 필름 편집 등을 주로 했고 현장에서 촬영 시스템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우기는 했다. 동시에 한국 광고산업의 어두운 면도 볼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이때에는 나를 홍보할만한 매체가 지금처럼 다양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한인 교민잡지에 광고하며 웨딩영상 촬영을 광고하기도 하고 혹은 한인 미용실이나 웨딩업체에 방문해서 영상 촬영을 홍보하기도 하였다. 프리랜서 일이 몇 개 있을 때도 있었지만 아예 없을 때도 많아서 프리랜서 업무를 하면서 영상회사 지원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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