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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Feb 26. 2024

재능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죠

에단호크의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소네트>

1. 처음 스타인웨이를 만난 날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쳐본 날을 잊을 수 없다. '검은건반과 흰건반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죠(Ebony and Ivory live together in perfect harmony)'라는 노랫말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폴 매카트니와 스티비 원더가 함께 불렀던 그 노래처럼 견고하고 또렷하게 건반이 빛나고 있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지긋이 손가락으로 눌러보자 맑은 물처럼 깊은 소리가 났다. 그동안 들었던 스타인웨이에 대한 찬사가 그저 환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손으로 만져졌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나를 괴롭히던 그 많은 걱정들은 '이 피아노로 제대로 된 연주를 한번 해보고 내려간다'는 단순함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리고 브람스의 인터메조 118의 2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wMd9IiQeE

Intermezzo in A major op 118 No 2

  

무대에 서면 눈빛이 '도는' 사람들을 봐왔다. 그들의 일상 역시 늘 평온한 것은 아니다. 아침을 못 먹거나 잠을 못 잤거나, 누군가의 부고를 들어 우울하거나 짜증 나는 다툼이 있었거나 혹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시간을 보내고 왔건 그들은 무대에서 다른 사람이 된다. 갑자기 플러그를 꽂아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가수라면 노래를, 뮤지션은 연주를, 또 MC라면 텐션을 올려 카메라가 돌 때 모든 것을 쏟는다. 경이롭고 부러운 순간이다. 그 황홀경을 쫓다가 문득 내 일이 카메라 뒤에서 이루어져서 다행이라는 씁쓸함을 마주한다.

언젠가 레슨 선생님의 권유로 참가하게 된 작은 연주회에 오르기까지도 무대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다. 일찍부터 암보를 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틀리는 반복 속에 허우적댔다. 어렵다는 부분을 해결하고 나니 생각지도 않은 파트에서 실수가 생긴다. 누구나 겪는 과정일 뿐이라는 선생님의 말도 들어오지 않는다. 무대 체질이었던 그들이 떠올라 더욱 괴롭다.

에단 호크에게 무대공포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좋은 감독들과 작업하고 독창적인 필모에 소설도 쓰는 할리우드와 인디영화, 어느 편에도 어울리는 몇 안 되는 배우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배우가 카메라를 두려워한다? 그 현장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는 우연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만한 사람을 알아보고 놓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룬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고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이 실수로 다가온다. 에단 호크는 부와 명예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2.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한다는 뜻일까


처음 만났는데도 고민을 털어놓기로 결심하게 한 사람.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오프닝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부분이 잘 안 돼요.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옥타브로 치는 건데"

깜짝 놀랐다. '피아노를 정복하다'는 신문 헤드라인으로 설명되는 피아니스트가 잘 안 되는 것을 먼저 이야기한다? 옥타브로 치는 것이 어렵다는 건 나 같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얘기가 아니었나. 피아니스트든 화가든 대개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연습 과정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반짝이는 순간에 흠이 될만한 일을 굳이 보여줄 이유가 없다. 작가 로맹 가리가 천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주목하라고 했던 미켈란제로처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추구했던 '아레테(arete)'를 실현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즉,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업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재 거부 선언처럼 시작된 세이모어의 이야기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무대공포증의 반대편에는 무대 경험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베테랑 배우가 후배에게 사인해주면서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후배가 말한다.

"저는 왜 연기를 할 때 긴장하지 않을까요?" 손을 떨 정도로 민감하지만 이럴 때 선배의 노련함이 드러난다.

"오, 그건... 잘하게 되면 긴장하게 될 거예요."


무대에서 긴장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 그의 실력이 폄하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실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50세가 되어서야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다고 느꼈다. 연주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뜻밖의 상황들, 상업적 의도들로 인해 집중하지 못하고 무대공포증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3. 불협화음 이후의 아름다움


모차르트를 치던 어느 날, 레슨 선생님은 한참 듣다가 한마디 하셨다.

"이 부분은 불협화음이니 너무 불편해하지 마세요."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깔끔하게 쳐야 한다는 강박으로 불협화음 파트를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니 연주에 드러났고 선생님이 알아보았다. 실은, 연주만이 아니었다. 나는 고통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했던 것 같다. 상처받기를 피하거나 돌아가는 쪽을 택하면서 그게 내가 원하는 길인 줄 알았다. 물 흐르듯 무리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 그 이미지를 안고 지내다 보니 고통에 더 과민반응을 일으켰고 회의감을 유독 더 느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고통 없는 삶이라는 건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독한 독감으로 골골대고 있을 때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도 감기가 다 나으면 행복을 느끼게 되지 않아? 평소에 쭉 건강할 땐 몰라. 기침 콧물 멎고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잖아. 기다려 봐, 행복의 순간이 곧 온다!"  

그렇다. 건강할 땐 건강을 모른다. 한번 아파보면 건강을 알게 된다.


세이모어의 말은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불협화음 뒤에 들리는 화음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져요. 불협화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화음의 아름다움을 모르게 되죠."

불협화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정말 그렇다. 온전한 화음만으로 이루어진 곡은 동요 정도 일까. 우리의 삶을 닮은 위대한 곡들은 불협화음을 풀어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갈등과 부조화의 긴 여정을 극복하면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온갖 방해꾼들과 폭풍을 겪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지만 출발점과는 다른 아름다움으로 도착한다.

 

4. 피아노를 다시 치는 이유


가끔 친구들이 묻는다. 피아노를 다시 배워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혹시 무대에 서거나 누구를 가르칠 것인지를.

좀처럼 마땅한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뒤늦게 피아노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스타인웨이를 쳐볼 수 있다고 해서 무대 체질이 아니면서도 연주회에 참여해본 것이다. 정말 피아노를 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세이모어의 말이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하게 다가온다.

"피아노 연습이 잘 된 날은 다른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갔고 연습이 잘 안 됐을 때는 뭔가가 삐걱거렸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NVxUvcDFUFA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중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억 속의 어떤 장면들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을 기억한다. 커가면서 하게 된 공부들은 나아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여주지는 않았다. 시험을 잘 보면 증명이 되겠지만, 점수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연습을 조금 해서 어제 안 되던 부분이 풀려가던 그 경험을 그리워한 것 같다. 추상적인 문서나 책에서 구할 수 없는 더 구체적으로 눈앞에 무엇인가 보이는 과정을 원했던 것이다. 피아노를 다시 쳐보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조금은 기억하려는 발걸음이었다. 피아노가 있던 방의 문을 열었을 때의 나무 냄새, 햇볕이 쨍하던 창 아래 빛나던 건반,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더 깊게 울리던 진동과 소리. 그 모든 유년의 기억 한 조각을 지금의 나의 일부로 끌어오는 실타래 같은 것.


세이모어의 고백은 계속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어요. 그게 어떤 재능이든 간에 재능이 사람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거죠. 음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끝없이 목표를 실현해 나가는 거죠."  


5. 뉴욕의 작은 방, 우주의 시작


무대공포증의 해결에 지름길은 없다. 무대에 대한 압박이 심할 때 세이모어의 해결방법은 연습시간을 네 시간에서 여덟 시간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결국,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연습과 노력이다. 진정으로 몰입한다면 그 밖의 것들은 사소해진다.

그는 무대공포증을 떠나보냈다고 느낄 즈음, 무대에서 내려온다.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교사로서의 길을 시작한다.


57년간 살았다는 뉴욕의 스튜디오 같은 작은 방. 침대를 접어야만 겨우 발 들일 수 있는 공간에 세이모어의 새로운 여정이 있다. 불필요한 사교활동이나 사치가 없는 단순한 생활. 집이 커지고 물건들이 많아지면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할 일들이 많아진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를 배제하고 수도승처럼 피아노 레슨에 일상의 모든 초점을 맞춘 일상을 살고 있다.

화려한 조명과 북적이는 객석은 아니지만, 세이모어의 연주는 작은 음악회로 이어진다.

스타인웨이 피아노 위로 슈만의 멜로디가 시작된다. 창 밖에는 행인들과 차들이 움직이는 평범한 일상이 흘러간다.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이 고개를 든다. 지구는 일상적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살아온 세상이 드러난다.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잊지 못할 고백이다.


"이 두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에요."

(I never thought that, with my two hands, I could touch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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