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Apr 08. 2024

지금 이 시간도 영원해질 수 있어

왕가위의 <중경삼림>

1. 러브스토리보다 영원한 것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그런 얘기가 있었다. 젊다는 건 주변에서 무언가 늘 사주고 싶어 하는 거라고. 짧은 기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을 수 있다고 고모가 어린 조카에게 알려준다.


신입생 시절엔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들 했다. 선배들이 점심을 사주느라 줄을 설 것이다. 

신입생 환영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수업 끝난 이른 저녁에 모인 어느 중국집. 신경 쓰이는 선배가 있었다. 아직 인사를 주고받기 전, 어떻게 그 선배와 인사를 나눌까. 정원이 많은 학과다 보니, 모든 선배들을 다 알 수는 없었다. 안 보는 척하면서 자리를 살피니 멀기도 멀다. 네 테이블 정도 건너 앉아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선배들만 잔뜩 다가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얘기들만 늘어놓는다. 어떤 아이들은 잔을 들고 선배를 쫓아다니기도 하지만, 난 그런 성격도 못된다. 시간만 자꾸 간다. 별과 별 사이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 간격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이러다가 그냥 집에 돌아가겠구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만 연락 온다는 머피의 법칙이 여기에도 예외가 없구나. 갑자기 답답해져서 화장실로 갔다. 오늘은 통성명 못하겠다 체념하다시피 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두 눈을 의심했다. 영화였다면 카메라가 줌인으로 확 들어갔을 것이다. 비어있던 내 자리에 그 선배가 앉아있었다. 어디에 앉을지 망설이기도 전에, 그는 맞은편에 앉으라고 하며 웃었다. 동기들은 슬슬 움직여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자연의 질서라도 잡아가는 듯 그렇게 움직였다.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서로의 이름을 묻고(이미 알고 있었지만) 악수를 나누었다. 


세월은 흘렀고 그 시간과 공간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순간의 설렘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는 과정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어쩌면 긴 스토리보다 한 순간이 더 영원할 수도 있다. 

<중경삼림>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스튜어디스가 된 왕비가 일하던 가게로 돌아와 셔터를 올리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양조위를 볼 때마다 그 시절의 두근거림이 살아난다.


2. '청킹 익스프레스(Chungking Express)는 떠나갔어도


매일 많은 사람들과 스쳐가지만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는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경찰 223, <중경삼림> 중에서


90년대 홍콩 침사추이에 있는 청킹맨션. 축축한 공기와 좁다란 골목으로 이어진 그곳에는 금발의 여인, 인도 사람들, 마약밀매, 총, 맥도널드, 주크박스들로 설명된다. 국적 없는 도시의 운명은 97년 반환을 앞두고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경찰과 청부살인자, 밀매상이 뒤섞여서 불안과 혼돈으로 들썩이는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딪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는 없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한쪽에서 쓰러져가지만, 또 어디에선가는 실연에 아파하거나 혹은 이유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달려야 하는 사람도 있다. 딴생각이 들지 못하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온종일 틀어놓는 점원과 다가오는 실연을 예감하는 경찰관도 그들 중 하나다.

흔들리는 도시의 불안 속에서도 사람이 있다. 어떤 날은 누군가 말만 걸어주어도 선물을 주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실연을 잊게만 해준다면 무엇에라도 빠져들고 싶다.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젊은 날의 특권인지도 모른다. 어둑한 어느 바에서 경찰 233은 금발에게 다가간다. 

금발이 입장은 또 다르다. 추격전을 벌인 전쟁 같은 하루, 이제 막 배신당하고 오는 길이다.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는 직업인 데다가 누군가를 좋고 싫어할 여력 따위 없다. 오늘 처음 본 그녀를 이해하고 싶다는 그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3. 실연을 이기는 방법


사람을 이해한다는 거에 큰 의미가 없어요. 사람은 어차피 변하는 거니까  

-금발의 독백, <중경삼림>


그 사람이 파인애플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도, 그다음 날에는 그 파인애플을 싫어할 수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을 당장 이해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좀처럼 말이 없는 금발이지만, 뭘 좀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크게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구나 잊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도, 또 나를 떠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아도 된다. 경찰이 오늘 금발을 만난 은 그 말을 듣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불빛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 넓은 호텔에서 두 사람은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낸다. 밤새도록 영화를 보고 샐러드를 쉴 새 없이 먹는 경찰. 선글라스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어버린 금발.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앞에 닥친 문제가 조금 작아지기도 한다.

호텔을 떠나는 경찰은 온종일 피곤했을 금발의 구두를 정성껏 닦아서 놓아준다. 누군가를 배려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실연의 함정에서 벗어났다는 신호일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유통기한을 마음대로 늘릴 수는 없지만, 이별이 삶의 끝은 아니다. 기대하지 못했단 다른 사람의 생일축하를 받는 날이 온다.

 

4. 너와 나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어딜 가고 싶죠?" 
"아무 데나. 당신 가고 싶은 곳으로"

-경찰관과 점원의 대화, <중경삼림> 마지막 장면 중에서


미처 로맨스의 순간을 이루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간 엇갈림의 순간들이 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전달이 서툴러서, 혹은 이유는 영영 알지 못한 채로.

한 때 누군가의 머릿속을 완전히 점령했음에도 세상에 없었던 일처럼 흩어져버린 시간들이다.

그 점원은 그래서 경찰관의 집을 바꾸어 놓는다. 과거의 연인의 기억이 담긴 물건을 조금씩 바꾸고 그가 듣는 음악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 넣는다. 그의 공간을 바꾸는 것은 어쩌면 내면을 변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들 역시 긴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스르르 낮잠이 든다.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될 줄 알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이대로 그들의 시간도 흩어져버린 것일까. 경찰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그녀가 즐기며 살고 싶어 한다는 것뿐이다.

 

서로가 아는 캘리포니아가 달랐다. 그는 카페 캘리포니아에 그녀는 멀고 먼 땅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시간을 한 바퀴 돌아서 과거의 그 가게를 다시 찾았을 때 꿈같은 현재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남에서 경찰관이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었지만, 결국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이 되었다. 서로의 미지의 시간을 받아들인 두 사람은 그래서 선택할 수 있었다.

무엇이 올지 모르지만 미소를 띠며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을 영원한 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중경(청킹)의 시간은 그렇게 계속 나아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0hSKwG_IPk&t=40s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1994>는 왓챠,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에서 볼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