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티 Apr 15. 2024

안녕,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2013>


1. 소리가 없는 세계로


숫자를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상실-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처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는 법을 익혔다. 이를테면 원소 주기율표에 빠져드는 것이다.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살면서 스트레스를 겪는 시기에 나는 늘 물리과학에게로 향했다. 생명이 없지만 죽음도 없는 세계로' 


지구에서 600km 떨어진 거리. 우주는 분명 지구와 달랐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소리가 없다. 우주에서 가장 좋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라이언은 소리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라이언 역시 상실에 대처하기 위해 우주로 향했다. 그 땅을 벗어난다면 아이를 잃은 고통과 슬픔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지구의 온갖 잡다한 소음에 지쳤을 때 우주로 나온다면 인간적인 감정에 동요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때때로 감정이 없는 세계가 궁금하다. 여행이나 휴가를 가듯이 피난처 같은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우주로. 

무겁게 발목을 잡아끄는 지구의 중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2. 지구의 경계선 너머


https://www.youtube.com/watch?v=2vOja57Op30&t=29s

우주인들이 지구를 벗어날 때 모두가 꼽는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서서히 지구를 벗어나서 바다가 대룍이 점점 멀어져 가고 구름이 아득해지다가 가느다란 푸른빛이 서서히 드러난다. 우주와 지구 사이의 경계선이 선명해져 가는 순간 그 경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한다.

왈츠의 선율처럼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가벼운 곳. 발자국은 남지 않아도 가뿐한 우주 공간이 그들의 일터이다. 우주인 동료 라이언과 코왈스키는 그 고요함 속을 유영한다.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컨트리 음악을 듣기도 한다. 

일이 있는 곳이라면 잡담도 필요하다. 코왈츠키가 가장 보고 싶었던 그 풍경, 지구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그는 라이언이 두고 온 지구에 대해서 계속 묻는다. 고향, 가족, 그리고 저녁 8시쯤 되는 주로 무엇을 하는지. 

그의 질문은 낯선 공간의 긴장을 덜어주는 것일까 지구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일까.


3. 우주의 눈물방울


소리 없는 그 세계에도 충돌은 있다. 우주의 잔해들이 예고 없이 날아들고 알 수 없는 기류에 떠밀려 정신을 잃는 라이언. 어렵게 교신하며 산소를 아껴 겨우 도착한 우주선에는 그보다 더한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잔해에 부딪혀 전원 사망. 

이제 남겨진 것은 하나의 끈에 연결되어 우주의 미아처럼 떠도는 두 사람 라이언과 코왈스키뿐이다. 

사람들과의 연결을 피하려 떠나왔는데 오직 하나의 연결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이번에는 단단히 붙들고 싶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엉킨다. 결국 놓아야만 하는 희망의 끈이 되어버린다.  

코왈스키는 죽음이 눈앞에 보일 때에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며 타인을 위해 먼저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 누구도 곁에 없고 연락도 없으며 그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은 무한한 세계 속에 던져졌다.

폭풍처럼 쉴 틈 없이 닥쳐오는 위기들을 모두 헤치고 라이언은 겨우 우주선에 도착한다. 외로움과 공포가 그를 짓누르지만 산소를 보강하고 우주복을 벗고 태아처럼 웅크려 무중력 공간에서 새로운 탄생을 맞는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희망은 선뜻 잡히지 않지만 그 속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박자를 맞추게 된 것일까.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길 바랐지만 보이지 않는 그 힘 안에서 우주 역시 움직이고 소멸하는 섭리를 견디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혼자서 버텨야 하는 슬픔. 눈물 방울이 공중으로 동그랗게 뭉쳐지면서 흘러간다.  

기다려주는 가족조차 없는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어린 딸의 죽음을 겪고 의사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8시면 혼자 라디오를 들으며 퇴근하는 일상. 어떤 음악을 들어도 상관없는 무덤덤했던 지구의 날들을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을까. 

   

4. 다르게 들리는 소리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가 우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흐릿한 말소리. 

바로 그 지구의 소리다. 지치고 피곤했을 때 피하고 싶던 그 소리에 눈물이 난다. 온 힘을 다해 조종대를 붙들어 본다. 지구가 가까워지고 있다.

대기권에 진입하여 바다를 거쳐 질퍽거리는 모래에 코를 박았을 때 온몸 가득히 번지는 흙냄새.  

문득, 생떽쥐베리가 사막에 불시착하여 모래밭에 쓰러졌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대지가 내 허리를 받쳐주고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밤의 우주 속으로 데려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커브를 돌 때 마차에 달라붙게 하는 것과 같은 중력으로 내가 지구에 달라붙어 있음을 알았다.

- <인간의 대지>중에서, 생떽쥐베리

 

궤도의 이탈은 끝났다. 라이언은 자리로 돌아왔다.

뉴턴이 궁극적으로 물체의 속도를 변화시킨다고 보았던 그 중력은 라이언을 끌어당겨 그 안에 무언가를 바꾸어놓았다. 그는 질퍽거리는 사람의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가 디딘 땅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전 29화 미래는 디스토피아의 꿈을 꾸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