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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Apr 11. 2024

미래는 디스토피아의 꿈을 꾸는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1. 대기업 브랜드 복제인간들을 찾아내라 


거기 누구냐?
서라, 신분을 밝혀라

- 셰익스피어, <햄릿>중에서


<햄릿>의 첫 문장이다. 12세기 덴마크 왕궁에 울려 퍼졌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2019년이라면 리플리컨트에게도 해당된다. 겉모습으로 인간과 구별이 안 되고, 말을 나누어봐도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주 식민지 시대. 대기업 '타이렐' 사에서 제조된 복제인간들은 4년짜리 소모품이다. 인간과 등등한 지적, 신체적 능력까지 갖춘 그들은 인간이 꺼리는 전투, 우주개발 같은 분야에 투입된다. 그런데 다 써버리고 난 후 폐기가 문제다. 인간의 기억, 학습을 거쳐 자의식에 눈을 뜬 그들에게 4년이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결국 우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수명 연장을 시켜줄 설계자를 찾아 몰래 지구로 잠입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골라내어 폐기하는 것이 바로 특수 경찰 '블레이드 러너'의 일이다.

리플리컨트와 인간을 판별할 수 있는 질문, 보이트 캄프 테스트를 거쳐 그들을 제거하는 것. 릭 데커드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2. 멋진 신세계는 왜 디스토피아일까


기술이 진보하고 있다. 힘든 일은 리플리컨트에게 맡긴다. 인간들은 더 이상 고되고 벅찬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400층 거대 빌딩에 에어카가 질주하는 2019년 그 신세계엔 산성비가 내리고 우중충하며 폐기해야 할 리플리컨트들이 어두운 뒷골목에 숨어있다. 현란한 불빛 화려한 네온 간판과 코카콜라 로고가 온 도시를 수놓아도 암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기술이 지배하는 고통 없는 안락한 사회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출산의 고통도 없다. 문명인인 그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야만이다. 아기들은 공장식으로 깔끔하게 배양된다. 예술이나 학습과 같은 수고를 굳이 하지 않아도 사회의 완벽한 시스템이 모든 것을 돌아가게 한다. 인간이 하나의 부품처럼 시스템에 따르기만 하면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런 완벽한 세상인데 일종의 우울증 환각제인 '소마'없이는 버틸 수가 없다. 멋진 신세계는 왜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리플리컨트들은 자신을 만든 설계자를 찾아낸다. 로이는 수명연장을 요구하지만 타이렐 회장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하고 절망한 그는 회장을 죽인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생명 연장의 꿈은 리플리컨트에게도 예외가 없다. 

남은 레플리컨트 커플 로이와 프리스. 그중 프리스가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에 의해 제거되었다. 연인마저 잃어버린 로이에게 최후의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리플리컨트와 블레이드 러너의 숨 막히는 전쟁이다.


3. 노예의 기분을 맛본 주인에게


격투 끝에 목숨이 위태로워진 데커드. 옥상의 난간 철근에 간신히 매달려 구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손에 힘이 점점 풀려가고, 아래쪽 풍경은 아득하다. 로이를 제거하기 위해 여기에 왔는데, 이대로 떨어져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그때 리플리컨트가 말을 건넨다.


"공포 속에 사는 기분이 어때? 

그건 노예의 기분이야"


언제나 인간의 명령에 따라 공포 속에 살던 복제인간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블레이드러너에게 손 내밀지 않아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를 살린다 해도 어차피 자신은 곧 죽을 테니까.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는데 다른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그는 자신의 연인 프리스를 죽이기까지 했다.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인간의 태도이고 주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야 하는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 삶의 주인이 된 복제인간으로부터


로이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선택을 했다. 리플리컨트로써 수명은 다 해가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된다. 그렇게 죽음을 피해 내달린 끝에 도착한 이곳에서 담담히 최후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을 위한 소모품으로써 사용되었지만, 그가 자랑한 것은 남보기에 번듯한 지위나 재산 같은 성공이 아니었다. 로이는 놀랍게도 자신의 생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 사람의 명령에 따라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는 언덕에서 잠시 땀을 닦을 때 반짝이는 햇빛의 찬란함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난 네가 상상도 못 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도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모든 기억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 로이의 마지막 대사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NoAzpa1x7jU

작동이 멈추었다. 그대로 굳어진다. 빗속을 헤치고 하얀 비둘기가 날아간다.

수명을 다한 리플리컨트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의 손길로 생명을 얻은 블레이드 러너의 내면에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는 이제 리플리컨트를 죽이지 않는다. 로이가 데커드를 살림으로써 데커드는 또 다른 리플리컨트 레이첼을 살리기로 한다. 

주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비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는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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