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차 백수
5개월이 지난 백수인데 아직도 뭘 하며 쉬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 웃기는 고민이다. 이러다 일 년 지나가겠네. 안식년을 하겠다 마음먹었을 때부터 고민하던 고민에 대한 답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 자신도 '어쩌라고' 소리가 나온다. 이렇게 매일이 휴일이고 휴가인데 왜 문득 짜증이 나고 답답하고 조급하기도 할까.
왜 그럴까, 문제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크게 5가지로 정리를 해본다.
1.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
2. 쉰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
3. 다시 일할 자신감과 용기의 줄어듦
4. 나만 뒤처진다(결혼, 경력, 돈 등)는 조급함
5. 더 신나게 놀아야 한다는 착각
해결방안 있을까. (고민에 대한 답을 적어본다)
1. 안식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뭘 해야 한다는 압박이 나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뭘 안 해도 된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대신 건강하게 잘 먹고 운동하고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2. 불안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 수입 없이 지출만 있으니까. 하지만 1년 쉰다고 무슨 큰일 안 생기고, 멀리 보면 정말 짧은 기간이다. 조급해하고 불안해할 시간에 새로운 걸 배우거나 도전하자. 떠나고 싶다면 떠나자. 다 할 수 있다.
3. 충분히 잘해 왔고, 잘하고 있으니 다시 시작해도 잘할 거라는 걸 믿어보자.
4. 남하고 비교하지 말자. 뒤쳐진다는 것에는 기준이 없다.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사람 주변에 잘 보기 힘들고, 돈이 많아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 많고, 경력은 나 충분하다. 당당히 안식년을 즐기자.
5. 원효대사의 깨우침을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니라.
그래서 내 마음대로 24시간을 쓸 수 있는 요즘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1.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슬리퍼를 쓱쓱 끌고 나가 빽다방에서 아이스 연유라떼를 사 온다. 집에 돌아와서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을 클릭해 소파에 앉는다. 음악에 신난다. 얼음 가득 시원하고 달달한 음료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진다. 양이 많아 마음도 든든하다.
2.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개념이 없다는 것이 생각보다 행복하다. 내가 그냥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싫은 요일이나 급박함, 쫓아오는 날짜 없이 그저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3. 아침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산책을 나선다. 호수공원을 반 바퀴도 아닌 1/4 정도 산책을 해도 좋다. 오랜만에 새롭게 등록한 필라테스 수업을 가서 선생님께 가끔씩 잘했다고, 자세가 좋다고 칭찬받을 때 성취감을 느낀다.
4. 필라테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하는 동네 구경이 재미있다. 빵집에 들러 빵 한 두 개와 슈퍼에서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온다.
5. 오픈 런이 아니더라도 한가로운 카페에 가서 혼자 카페 공간을 누릴 수 있을 때 이것이 백수의 혜택이란 생각을 한다.
6. 여행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떠올리고 바로 떠날 수 있고(국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면 예전보다 쉽게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게 좋다. 가동성과 실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
쉬면서도 불안한 건 어쩌면 당연한 기본값인 것 같다. 확실하고 확정된 미래가 없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일 테니. 그건 안식년이 아니고 지금 직장생활을 하거나, 어떤 다른 일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행복이' '슬픔이' '짜증이' '기쁨이' 등 내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있는 것처럼 적당한 불안감은 가지고 가자. 불안함은 어쩔 수 없는 디폴트 값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