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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Oct 28. 2022

나의 대한 마음가짐

아픈 사람은 언제나 성별 대신 환자라는 칭호가 붙는다. 병원에서의 성별은 신체 구조적으로 호르몬과 유전에 따라 달라지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가끔 병원에 입원해있다 보면 병실을 같이 있는 옆자리, 앞자리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그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 여자아이들은 몸집이 작아서 간호하기 수월하겠다.’라던가 ‘남자아이는 커서 엄마가 간호하기 어렵겠다.’ 이러한 생각들이 이따금 들었다. 오랜 병원 생활은 성별의 무감각과 단순히 편의성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그런 내게 성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순간들은 찾아온다. 이를테면 생각지도 못한 유방암 선고라고 해야 될까? 의사 선생님이 유방암이라고 말할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렇게 가슴이 작은데 유방암에 걸릴 수 있다고?’ 어이없는 놀라움이었다. 가슴은 여자의 상징성이자 남자들은 없어서 더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는 그런 여성의 美를 상징하는 아름다움이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렸다. 당시 수술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도 가족들도 나에게 좋은 수술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환자이기 전에 여자이고 싶었다. 엄마가 이런 말은 한 적이 있다. 


“엄마는 그래도 다행이야. 그렇게 된 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건강하잖아.” 


말을 듣고 “응, 다행이야.”라고 말하고 늦은 새벽, 가족들의 시선을 피해 모두가 잠든 시간을 이용하여 샤워를 했다. 다 잠든 시간이었지만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물소리에 울음소리를 숨기고 그야말로 엉엉 울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두 눈이 보기 흉하게 부어있었다. 가슴을 수술하기 전에는 엄마가 샤워 후 옷가지들을 챙겨주었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난 직후부터는 탈의를 하고 나면 보여지는 양쪽 가슴 부분에 커다란 흉터를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마저도 내가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샤워시간은 언제나 늦은 새벽이 되어있었다.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었다. 전에는 엄마가 사준 속옷만 입고 속옷에 대한 관심도 없었는데 수술하고 난 후부터 나는 쇼핑몰을 구경할 때도 속옷 브랜드 사이트를 들어가서 색색의 속옷을 구경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보던 속옷 광고를 하는 홈쇼핑에 현혹되어 갑작스레 속옷을 내 손으로 구입까지 해버렸다. 수술 후 나에겐 이제 그다지 필요 없어진 브래지어지만 그전에 누리지 못했던 나의 대한 보상이라도 원하는 사람처럼 한동안 속옷만 보면 엄청난 구매욕을 느꼈던 시기였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순간 현타(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가 오는 순간이 찾아왔다. 

유난히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쬐며 햇살이 눈부시던 그날은 수술 후 오랜만에 외출하던 날이었다. 수술 전 입었던 옷들을 입으니 그토록 이상하고 어색할 수가 없었다. 옷맵시가 허전한 마음에 보정 속옷을 입고 그 안에 흔히 뽕이라고 불리는 가슴 보정용 실리콘을 속옷 안에 넣고 옷을 입고 부푼 가슴이 만족스러워진 나는 밖으로 나섰다. 가만히 받고 있으면 기분 좋은 햇살이 여름이 다가옴을 알려주었다. 엄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든 내 것이 아니면 불편한 법이야”

엄마의 말처럼 내 욕심으로 꾸민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이 커져갔다. 따뜻한 햇살에 기분이 좋기보다는 피부와 실리콘 사이에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맺히는 땀이 찝찝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착용하고 있으니 무게도 굉장히 무거웠다. 내가 생각했던 B컵으로 수술을 했다면 이 정도의 무게였을까? 문득 궁금함이 떠올랐지만 이미 지난 문제였기에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이 날의 하루는 제법 괜찮은 하루였다. 오랜만에 마시는 바깥공기, 보고 싶었던 친구와 만남, 수술 후에도 달라질 것 없다는 나의 대한 마음가짐.


 나는 그렇게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을 때쯤 지잉-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낮 시간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와 찍었던 사진을 친구가 메시지로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우리가 함께 웃으며 있었고, 나는 사진을 보며 묘한 씁쓸함과 허망함을 느껴야 했다. 사진 속 나의 모습은 내가 만족했던 모습과 달리 유독 부자연스러웠다. 웃고 있는 입과 달리 경직된 몸은 부자연스럽고, 가슴은 또 왜 크게 나왔는지. 사진을 보는 게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평소 내 몸 안에 있는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 것들 투성이로 만들어진 몸을 불편하게 여겼을 때가 많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팔과 다리만으로도 불편하다 투정했던 나는 굳이 불필요한 가슴에까지 집착하고 있었다. 짓눌렸던 오늘 하루의 무게는 실리콘을 뺌으로써 함께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실리콘에 눌려 있던 살갗은 시원한 공기를 만나 하루 종일 찝찝했던 찝찝함을 씻어내 주기 충분했다.


하나만 포기해도 이토록 편한걸. 불편함을 감수하고 꾸며지는 걸 좋아하는 모습도, 모든 걸 포기한 모습도 온전히 나의 것, 나의 마음가짐은 달라질 게 없기에 어떤 모습이라도 나였다. 

 그날 이후로 달라진 부분이 있다. 매일같이 둘러보던 속옷 사이트를 더 이상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 평소에는 무리하게 인위적인 모양의 부푼 가슴을 만들지 않는 것. 


그렇게 지내니 전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가슴이 있어서 불편한 점들이 사라진 게 아니던가, 더운 여름날이 찾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불필요한 보정 속옷을 입지 않아 더위에서 한 꺼풀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가슴 사이즈가 작아도 속옷을 입지 않으면 얇은 옷 위로 비치는 부분 때문에 항시 속옷을 착용해야 했던 지난날들과 달리 이제는 그런 부분에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조금씩 천천히 삶에서 불편함을 덜어내는 과정을 새롭게 배우고 있는 중이다. 눈으로 보이는 여성상을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여자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람.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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