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명을 알아도 나는 병을 고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냥 병을 견뎌 내거나 버티거나 둘 중 하나.
상태가 더 좋아지긴 힘들어도 유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수술과 다양한 약을 먹고 있다. 크고 작은 약 부작용은 매번 외래진료를 받을 때 상담을 받는다. 대학병원의 외래진료 시간은 길게는 십여 분 짧게는 이삼 분 이내, 짧은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 시간을 포함하여 기다리는 시간은 반나절은 기본, 오후에 진료가 있다면 하루는 도로와 병원 대기실 의자, 주차장에서 초조하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환자는 교수님의 짧은 말 한마디에 울고 웃곤 한다.
작은 희망적인 말씀을 하신다면 새벽 일찍 지방에서 올라와 기다리던 시간이 아깝지 않다. 온몸을 지배하던 피로감도 날아갈 듯 잊은 채 몸도 마음도 가볍지만 좋지 않은 결과라던가 다른 검사라도 해보자는 말을 듣는다면 절망적인 감각과 초조함이 다음 진료 일까지 우리를 지배한다. 애써 엄마 아빠, 그리고 나는 태연한 척 각자의 마음을 숨긴 채 집으로 향한다.
처음 병원을 다니기 시작할 무렵, 내 병은 국내에서 앓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병명을 진단받기도 어려웠다. 그 무렵 어렵게 찾았던 나의 병명은 골형성부전증이라는 병과 함께 찾아오는 다양한 합병증이었다.
국내에는 800명도 채 되지 않는 환자가 있었고 그중 한 명이 나라고 한다. 당시 병명을 찾긴 어려웠지만 병을 설명하기엔 쉬웠다. 다발성 골절, 뼈의 변형, 차후에 생길 합병증 구루병 동반 등…. 뼈를 만드는 콜라겐 유전자에 이상이 생긴 경우에 발생하는 질환으로 특별한 원인 없이 뼈가 부러지거나 쉽게 붙지 않고 낫는 과정에서 뼈가 변형되는 병이라고 말했다.
나는 환자 중에서도 정도가 심하고 다친 정강이뼈 변형이 심각한 측에 꼈었다. 내 오른쪽 다리는 ㄱ모양으로 변한 정강이뼈가 곡선을 그리듯 휘어졌었는데 그 부분의 뼈는 흔한 이쑤시개보다 가늘고 약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수시로 자연적으로 부러지기를 반복했었다. 심하게 휘어진 뼈는 교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수술조차 시도하지 못했었다.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던 날, 병원을 다녀오는 길 집이 아닌 바닷가로 향했다. 휘어진 다리가 유독 징그럽고 서러워 병원 다니며 처음으로 끅끅거리며 엄마 앞에서 울어버렸고 엄마도 나를 토닥이며 재빠르게 눈물을 닦아내도 계속해서 흐르는 물줄기를 숨기지 못하셨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아빠가 바닷가 앞에서 사 온 붕어빵을 베어 물며 다 나오지 못한 눈물 대신 웃음을 걸쳐보았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감춘 채 병원을 다니던 우리의 마음속 가면이 감정을 끝까지 숨기지 못했던 날이라는 걸 말이다.
수술조차 할 수 없다는 다리의 수술이 결정이 된 건 상태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최악으로 좋지 못한 상태가 되어서였었다.
변형이 진행될 대로 되어버린 다리의 뼈는 더 이상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만큼 X-ray 상에서 뼈는 실 가락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뼈는 휘어져서 휘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조각조각 끝없이 끊어지는 고통 끝에 선생님이 도전이라도 해보자고 결심을 하신 끝에 마침내 나는 수술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었다. 영화나 TV에서 봤던 수술실에 들어가는 장면은 바로 수술실이 보였는데 현실은 그보다 훨씬 길고 멀게 느껴졌다. 덜컥거리는 이동용 침대에 실려 천장밖에 보이지 않는 긴 복도와 여러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복도를 지나자 비로소 차디 찬 수술실에 도착했다. 수술실이 유독 추웠던 건지 긴장감에 더 춥게 느꼈는지 싸늘한 기운은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이동식 침대에 누워서 보았던 긴 공간의 하얀 천장은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천장 중에 가장 하얗고 눈이 부실만큼 아찔한 공간이었다. 온몸에 떨릴 만큼 차가운 수술대에 옮겨진 나는 눈부심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을 해버렸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간호사 언니들의 점심 메뉴 고민 소리와 극심한 통증이 나를 지배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아픈 와중에 점심을 고민하는 간호사 언니들의 목소리가 귀에 박히듯 크게 들려왔다.
그들에겐 수술 후 아파하는 환자의 모습은 익숙한 상황이지만 당시 나는 무척이나 아팠고 수술을 위해 하루를 꼬박 금식을 했던 나에게 그들의 대화는 아픈 와중에도 짜증이 날만큼 얄미웠던 거 같다. 병실에 와서도 수술이 끝나고 제대로 발을 움직일 수 있는지 재차 확인하는 간호사 언니에게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꽤나 신경질을 내며 아픈데 어떻게 움직이냐고 소리를 친 기억도 있다. 그때 나는 ‘나도 이렇게 성질을 낼 수 있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며칠간의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신 후에 누운 상태로 발가락 끄트머리를 보았다. 나는 변형된 다리에 어느덧 익숙해져 다리를 쭉 뻗고 휘어진 정강이가 아닌 반듯한 정강이를 지나 세워진 발끝을 볼 수 있는 게 굉장히 낯설고 설레었다. 묵직한 깁스에 움직일 순 없지만 붕대가 감긴 곧은 정강이 아래로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보는 게 너무 신기했었다. 익숙함에 속아 본래의 모습도 까먹을 뻔했던 것이다.
수술은 무사히 잘되었고 ㄱ모양으로 변형된 다리도 얼추 반대편 다리와 엇비슷하게 펴졌다. 다만 변형된 지 오래되어 휜 상태로 성장이 진행되어 자연스레 정강이 아래를 보호해주는 근육이 늘어나지 않은 채 짧은 상태로 성장이 멈췄다고 한다. 근육 길이의 한계와 차후 근육을 늘려도 가느다란 뼈조차 남아있지 않아 지탱할 뼈가 없는 상태로는 사실상 반대쪽 다리 길이와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의 내 양쪽 다리는 오른쪽과 왼쪽의 길이가 10cm 이상 차이가 난다.
성인 손 한 뼘 정도가 차이가 나는 건 보기에도 적나라하게 티가 나는 길이었다. 다리가 휘었을 때의 다리 길이는 맞았지만 다리를 뻗을 수 없었기에 결국 이 때도 다리의 길이는 맞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은 바지의 양쪽 길이는 맞지 않지만 다리를 곧게 뻗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라면 다리 한쪽이 심하게 짧은 걸 택할 것인가? 휘어진 다리를 택할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의 답은 보통 정해져 있다. 휘어서 땅을 디딜 수도 없고 매일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새벽 내내 잠 못 이룰 바에는 다리가 짧아진 게 훨씬 나은 선택이란 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가끔 짧아진 다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한다.
수술하기 전에는 수술만 해서 다리를 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했던 나를 잊고 나쁜 생각도 해보았다. 만약 아예 발까지 없었다면 의족이란 걸 끼면 아무도 모르게 다리 길이를 맞출 수 있지 않을까?라는 못된 마음에서 드는 아주 나쁜 생각. 발이 있는 나에겐 의족이라기보다는 키 높이 신발을 신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높이가 10cm 이상 차이가 나서 벽돌 하나를 세워 신발에 붙여 놓은 거처럼 투박하고 커다랗게 되어 있어서 움직이기가 불편하여 신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저마다의 아픔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의 아픔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내 아픔이 더 크게 느껴져 그걸 외면해버린다. 내 아픔에 빠져 허덕이며 더 불행하다 여기고 낙담하며 지내는 거 같다.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생각보다 많이 신경 쓰고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다리가 휘어진 걸 최대한 보이기 싫어 긴 바지만 입는다고 했고, 지금은 바지 한쪽이 접히는 게 싫었고, 그보다 상황이 나아지니 짧은 다리를 감출 수 없던 게 끝내 싫었던 거다.
하지만 내 자신을 감출수록 나를 생각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나조차 나를 부끄러워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나부터 당당해져야 한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말자.
스스로 다짐을 해보았다. 나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들어주는 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도 포함되어 있기에 나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