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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일기 #16] 싸워야 해 말아야 해?

임신 16주차, 화장실 청소

by Sylvan whisper

'화장실 청소는 내가 해야 되는 거야?'


아내는 임신을 한 이후로 특히나 너 냄새에 민감해졌다. 이 냄새의 유형이 악취라면, 그 민감도는 더더욱 심해졌다. 냄새나 소음 등 이전에도 내가 아내보다 좀 더 둔감한게 사실이지만, 아내가 이런 미세한 외부 스트레스 요인을 더 잘 '감지'하게 되었다. 산모가 되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 같기도 한 것이, 산모는 제 몸을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감지'란 '보호'의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연식이 꽤나 오래된지라, 아무리 청소를 해도 남아있는 흐릿하지만 불쾌한 냄새가 배관을 타고 올라온다. 그리고 아내의 임신주차가 쌓여갈수록 불쾌한 향이 올라오는, 혹은 느껴지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이로 인해서 우린 화장실 청소 주기를 정하여 정기적인 냄새 제거 작업에 돌입했다. 물론 임산부인 아내가 허리를 굽히고 락스 냄새를 맡고 있을 순 없기 때문에 이는 응당 내 역할이었다.


아내의 건강과 쾌적함을 위해서 남편인 내가 화장실청소를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아주 가끔 억울한(?) 상황들이 있었는데 이는 보통 다음과같은 경우에 시작했다. 우리가 지정한 화장실 대청소는 보통 주말이었는데, 주말 내내 집을 비우는 스케줄이 있었던 사유로 청소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화장실 청소는 내가 해야 되는 거야?'


아내의 이런 반어적인 표현이 나오게 되었던 날 또한 동일했다. 집을 비우는 바람에 주말에 청소를 하지 못했고, 아내는 내게 몇 번의 청소 요청 시그널과 또 몇 번의 직접적인 요청을 보내왔다. 나는 월 화 중으로 청소를 하려고 생각했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화요일 밤에 아내가 기다리다 지쳐 저 말을 뱉기 전까지도 이를 수행하지 못했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내 몸은 하루를 버텨낸 내 핑계 뒤로 계속 미끄러진 것이다.

그런데 나 또한 아내의 이 말에 순간 욱 하는 감정이 올라온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아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내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나의 다짐 혹은 목표였음에도 말이다. 당시 나는 꽤나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내를 위해서, 아기를 위해서 이만큼이나 노력한다'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은 자만심을 갉아먹어가며 몸집을 키워갔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만들어댔다.


'아내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나, '내가 이렇게나 노력하는데?'라는 혼자만의 의문과 억눌린 감정을 키워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들은 처음엔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임신한 아내와 싸워선 안 된다'라는 다짐아닌 다짐이 이러한 마음을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마음들을 단순히 통제만 하는 것은 부작용으로 번지게 될 것이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과 그에 얽힌 오해들을 혼자만의 잘못된 원칙으로 막아서던 것은, 이상한 흐름을 타게 되었다. 처음엔 '말할까 말까' 였던 것이, 싸우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해져 '싸워야 해, 말아야 해'라는 고민으로 발전했다. 이 고민이 마음속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 수록 잘못된 '화'같은 것 또한 쌓여갔다.




결국 그날 우린 다투게 되었다. 내 잘못된 '화'와 억울함, 그리고 아내와는 협의조차 된 적 없는 나만의 원칙이 결합된 결과였다. 그래도 우린 최선을 다해 서로 절제된 문장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 또한 여태까지 묘사했던 나의 사고 과정들을 모두 털어놓게 되었다.

'아내도 이정도는 해줄 수 있는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은, 아내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큰 깨달음을 통해 부서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아내가 내게 몇번의 요청을 했는지, 완곡한 청소요청의 시그널을 몇번이나 보냈는지도 이 대화를 통해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마무리는 역시 내 잘못에 대한 깨달음과 후회였다. 원망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독이 된다.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면 더더욱 진하다.



혼자만의 속앓이는 필연적으로 상처를 덧나게 한다. 이는 통증을 더 악화시킨다는 간단한 진리를 우리는 매번 같은 실수를 통해 깨닫는다. 서로에 대한 소통을 부드럽고 정제된 언어로 구성하는 것 또한, 이 속앓이가 발효되기 전 빠른 시기에 시작해야 그 난이도가 낮다.


때문에 '싸워야 해, 말아야 해?'라는 의문은 애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먼저 소통을 한다면, 이는 '싸움의 여부'가 아니라 단순한 규칙 정하기, 부탁하기 혹은 응답하기 정도의 '의사결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들은 강박적으로 아내의 감정과 심리를 긍정적으로 유지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나와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런 에피소드처럼 혼자서 부정적인 감정을 키워가고 있는 남편이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건 애초에 '갈등'이 아니라 협의를 통한 '의사결정의 부재'가 아니었을까?'






한 줄 정보

1. 임신 중 후각이 예민해지는 건 ‘HCG(임신호르몬)’과 에스트로겐 상승 때문이며, 이는 진화적으로 태아 보호 메커니즘으로 본다

2. 임신가정에서는 가사 분담을 ‘일의 양’보다 신체적 위험 요소 중심으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3.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남편들의 역할 전환기에 흔히 겪는 내면 감정 충돌 포인트다.

4. 산모가 장시간 몸을 숙이고 힘쓰는 자세는 골반저근, 복부에 압박을 주어 요통·골반통을 악화시킬 수 있다.

5. 태아는 화학물질 배출 능력이 약하므로 락스·강산성·강염기성 세제는 가능하면 임신부가 직접 다루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6. 16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철분제를 복용해야 한다. 산모의 빈혈예방, 태아의 혈액 생성에 필요하다.

7. 태아의 귀가 완성되어간다. 엄마의 몸속에서 나는 소리와 자궁 밖에서 나는 소리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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