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20년에 2020일을 맞이했다. 그는 군대에서, 나는 방 안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지 어언 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일상에 익숙해지고도 남았을 기간이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단 생각을 간간히 하면서 일상을 보내다가 저녁에 짧은 전화로 목소릴 듣는다. 보통 특이한 일을 겪었거나, 맛있는 걸 먹었거나, 오늘의 우울한 사람이 대화의 주도권을 가진다. 이제 군인에게도 핸드폰이 주어져 카톡으로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만 여전히 서로의 목소린 귀하다. 유난히 반복적이고 갑갑했던 2020년의 일상 속에 2020일이라는 숫자는 길었던 연애를 되돌아보게 했다. 이러다 서로가 어색해지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될 정도로 길어진 서로의 공백은 당연했던 연애의 일상을, 그리고 앨범 속 몇 만장의 사진을 남의 것 혹은 추억처럼 바라보게 했다. 누군가는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 할 수 도 있지만 2020일 중 그와 가장 오래 떨어져 본 게 세 달인 나는 그랬다.
2020일. 연애가 아닌 어떤 일을 갖다 붙이더라도 이견이 없을 긴 시간. 100일엔 벌써 100일인가, 1주년엔 벌써 1주년인가 해왔지만 그것들마저 까마득해지는 사간이었다. 나에게 약 6년은 대충 인생이란 피자를 다섯 조각낸 것 중 하나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어느새 애매하다고 할 수 도 없는 명백한 긴 세월이 되었다. 그 감각을 느끼고 나는 자주 핸드폰 갤러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들은 연애를 끝내고 헤어지면 연인의 흔적을 지우고 사진을 지운다던데, 만일 우리가 그래야 한다면 핸드폰에 남는 사진은 몇 만장 중에 1000장은 남길 수 있을까? 그 밖에도 새삼스러운 생각들이 함께 떠올랐다. 어쩌다 서로에게 호감과 매력을 느꼈을까. 첫 만남이 어땠지? 난 그의 어떤 모습이 좋았던 걸까. 뭐 이런 새삼스러운 것들에 대해. 사진을 내리며 과거로 떠났다가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 돌아오면서 나에게 있어 연인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까지에 이르렀을 때, 답을 내릴 수 없는 커다란 모순점에 다다랐다. 연애로 인해 바뀌어버린 나 자신과 인생의 방향이 만족스러운가.
확신하건대, 연애라는 것이 없었다면 나라는 사람과 삶은 전혀 달라져 있었을 거다. 그것이 한편으론 아쉽고 후회됐고, 한편으론 만족스러웠으며 퍽 마음에 들었다. 이 복잡스러운 싱숭생숭함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경외심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사랑을 꿈꾸는 자들에 대한 하고 싶은 말들이 차올랐다. 나는 ‘좋아한다’라는 이유로 가볍게 연애란 걸 시작했고 당연히 그것이 2020 일이란 시간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 연인과의 첫 만남부터 내 인생이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는 것도 비단 알지 못했다. ‘사귄다’라는 시작이 인생의 전혀 다른 제3의 길로 가는 출발 신호탄이 된다는 것도 몰랐다.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숱하게 보는 영화나 만화 속 주인공이 연애로 인해 신분 상승하고,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혹은 악인이 되고 갱생하고... ‘함께’하게 됨으로써 변화를 겪는다. 연애라고 하면 간질간질한 시작과 갈라서게 되는 극한의 슬픔만이 내세워져서 그렇지, ‘같이’의 가치와 책임은 무섭도록 묵직하다. 끝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거나 ‘홀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의 과정은 인생을 충분히 바꾼다는 얘기다.
부모 간에도 사랑이 있고 친구 간에도 사랑이 있는데 왜 연인 간의 사랑의 묵직함만을 길게 이야기하고 있느냐면, ‘연인’이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깊숙하게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고 침투할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짤로 돌아다니는 사진만 해도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부모, 친구와 연인이 내 몸을 만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부위가 다르며, 가장 자유롭게 터치하는 것은 연인이라고. 나는 그것이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그렇다 본다. 부모의 사랑과 친구와의 사랑을 별거 아니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당연히 100명이 있다면 100개의 사랑이 있듯 개인차가 있다. 그렇지만 연애의 사랑이란 것만큼 까다롭고 기대하는 바가 많은 것도 없다. 여자 친구(남자 친구)의 이름표를 달게 되면 다른 사랑의 종류와는 달리 ‘연인’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사람마다 그 약속이 다를지언정 그 약속이 깨지면 공식적인 이별을 하고 흔적도 남기면 안 되는 것이 국룰인 사랑도 없지 않은가. 결이 다른 사랑인 만큼 사랑의 방식 또한 각각 다르기에 서로에게 침투할 수 있는 부위와 범위도 다르단 말을 하고 싶었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혼자를 고수하는 것 또한 결이 다르다. ‘같이’의 가치가 있고 ‘혼자’의 자유가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써내려고자 하는 것은 ‘연애’라는 것이 사람의 광범위한 부분에 있어서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바꾸게 되는지에 대해서다. 2020일이 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긴 연애를 하나의 예시로서 파헤쳐 볼 예정이다. 장르는 에세이지만 소설처럼 읽으며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사랑에 대한 경각심, 그리고 공감으로 다가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반면 선생이 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