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의 어느 날, 네가 엄마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버티더라. 눈물은 고이고, 입술은 다물고 있는데 엄마의 잔소리에 눈으로 너를 표현하기 시작했어. 엄마한테 그거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 엄마 말이 맞는 거 아니라고. 나도 말할 수 있는데, 참고 있는 거라고. 너의 눈을 보며 엄마도 움찔하게 되더라. 나는 얼마나 똑바로 살고 있다고, 내가 너에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사춘기, 너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 사춘기, 너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딸아, 부쩍 우리를 떠나 너의 길을 갈 때가 많아졌다. 친구들끼리만 지하철을 타고 놀이공원을 간다고 들떠서 신나는 모습과 반대로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건 이제 다 “싫은데”구나. 방에 들어가면서 문은 바로 자동으로 잠금이 ‘탁’ 소리와 함께 눌러지고, 네가 밖에 볼일이 있지 않는 한, 집에서도 너의 얼굴을 볼 수가 없네. 그 볼일이란 화장실 아니면 부엌에 배고파서 먹으러 나올 때 정도.
5학년 1학기까지만 해도 밤에 혼자 자기 무섭다고 엄마랑 동생이 함께 자는 방에 구박받더라도 꼭꼭 옆에서 잤던 너인데. 어느새 무서움을 이겨내고, 너 혼자의 길을 용감히 가고 있어. 7살 때 아이를 잃어버리고 6년을 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인 ‘나를 찾아줘’라는 영화를 봤어. 주인공인 엄마가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한단다.
“아이가 어릴 때 너무 힘들어서 일주일만 나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마음 때문에 벌을 받나 봐. 나 때문이야.”
어디 엄마의 탓이겠니. 엄마도 감정이입이 돼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 엄마 역시 너희를 키울 때 비슷하게 생각할 때가 많았거든. 매일이 같은 날 같고, 언제 끝나는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정말 딱 하루 만이라도 마음 편히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 네가 훌쩍 날아가는 새처럼 엄마의 곁을 떠나갈 줄 알았다면 좋았을 걸.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미리 주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해 줘도 다 귓등으로 흘려듣다가 어쩜 딱 겪어봐야 아차! 하고 알게 되는지. 막상 겪게 되니 엄마 마음이 서운함, 미안함, 아쉬움이 복잡하더라.
돌이켜 보니, 엄마도 너와 비슷했어. 너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5학년쯤부터 엄마도 집에만 오면 방에만 들어갔단다. 그때는 집에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고, 거실에 있는 TV 한 대가 유일한 오락거리였지. 그럼에도 방에 들어앉아서 책도 읽고, 멍하니 앉아도 있고, 거울도 보고, 엄마의 시간을 보냈어. 즐거울 때도 있지만, ‘나는 왜 이럴까’ 하며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로 우울할 때가 더 많았단다. 엄마는 친구도 많지 않아서 중학교 때까지 쭉 학교와 집만 오가며 보냈던 것 같아. 참, 재미없게 살았던 것 같지. 동굴 속에 혼자 갇혀 있는 것 같은 어둠의 시간이었지만, 치열하게 엄마 자신에 대해 생각했었어. 거울 보며 나랑 대화도 많이 했고. 이때부터 엄마는 나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이랑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던데, 엄마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단다.
너는 방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니? 네가 그런 말을 했어. 방에서 지낼 때 핸드폰도 보고, 책도 읽는데 생각을 많이 한다고. 네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에 답도 찾아보고, 상상도 하고, 웃긴 것들도 떠올려 본다고. 이 말이 참 반가웠어. 너라는 실체와 점점 만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었지. 그렇기에 사춘기에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한 거야.
너의 또 커다란 변화는 바로 아이돌 덕후지. 4학년 때부터 좋아했던 트와이스 언니들을 너는 지금까지도 4년 넘게 생활의 중심에 두고 있단다. 노래 좋아하고, 춤 따라 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언니들의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 앨범을 2개 이상 산다고 할 때, 굿즈를 사겠다고 1시간 거리까지 가자고 하고, 비싼 굿즈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모습들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 엄마가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래. 지금은 이런 부분은 뭐, 그러려니 하지만 요즘 또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지.
트와이스 안에서도 최애 하는 아이돌 언니의 생일에 카페 이벤트가 열려. 그 언니가 카페에 오는 것도 아니고, 카페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틀어주고, 포토카드를 선물로 주거나 뭔가 행사가 있는 정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에도 가겠다고 하고, 저기 먼 곳까지도 가겠다는 거야. 엄마랑 두 번 정도 가자 하더니 이제는 친구와 위치 다 알아서 3군데나 투어를 하고 오더라. 엄마와 두 번째 갔을 때 왜 가는지 진지하게 물어봤더니 너는 이렇게 말했어.
“엄마가 강의 들으러 갈 때 신나서 가는 것처럼, 나도 다녀오면 뭔가 해내는 것 같아 뿌듯해.”
네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빗대어서 표현하니까 할 말이 없더라. 엄마가 좋아하고 설레서 뛰쳐나가는 시간처럼 너에게도 그런 마음이라는 거잖아. 바로 이해가 갔고, 꼬리를 내렸지. 네가 같이 와 줬다고 음료도 난생 처음으로 사 주고. 너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구나. 엄마가 너무 의미를 낮게 여겨서 미안해. 이 때부터 생일 이벤트 카페 간다면 허락해 주고, 같이 다녔지. 함께 가자하는 것도 고마워하면서 말이야. 그랬다가 브런치 글이 다음 메인에도 올라갔잖아. 우리 딸 덕분이지. 트와이스 덕후분들이 팬 카페에 글을 공유해 주고, 엄마를 좋게 봐줘서 엄청 뿌듯했었어.
https://brunch.co.kr/@aracharim/43
예전에 집단상담에 참여한 고등학생 언니가 이런 말을 했어. 공부도 못해서 성적도 떨어지고, 부모님한테 한 소리 들었을 때 속상하고, 나 자신이 싫어진대. 그럴 때 어떻게 하는지 물었더니 덕질을 한다는 거야. 깜짝 놀랐지. 사람들이 덕질을 하는 이면에는 건전하게 취미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나 자신이 싫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대신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는 가슴이 아팠어. 덕질이라도 해서 자신이 누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
너나, 그 언니가 하는 일에 적극 지지를 하고 싶단다. 너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에 엄마가 너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노력할게. 엄마는 너와 같은 시기도 겪어봤고, 어른의 입장도 겪고 있어서 다 알고 있잖아. 어른의 시선이 맞다, 옳다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두 시기를 겪으며 모두 포용해서 조화를 이뤄가도록 하고 싶어. 그게 엄마의 역할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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