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다의 첫 소설『대만졸업』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입니다.
현실의 인물, 사건과 유사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입니다.
일부 인물 및 장소는 서사의 흐름상 가명 또는 허구적 설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서서히 무채색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삶에 조금씩 가느다란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가정불화를 겪고 가족들 간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여러 번 나면서 서로간에 신뢰를 회복하기 힘들었다.
대한민국의 대표 학군지에서 학창시절을 모두 보냈던 그녀였기 때문에 이렇게 소속감이 없는 채 하염없이 멍 때리는 시간을 보낸다던가 계획 없는 여행을 가는 것, 학생 때 암묵적으로 금기 시 되었던 것들을 외국에서 일본인 남자친구와 과감하게 저지른다는 것이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수년간 숨막히는 스케쥴과 강박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억제하는 삶이 익숙했던 그녀였기에 이미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인 이 우울감을 완벽하게 씻어내지는 못 했다.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걱정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 웃다가도 어느 순간 얼굴에 그늘이 지는 그녀에 비해 그는 대만에서의 삶을 만족해하며, 일본을 떠나 자유롭게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행복해보였다. 한국 입시에 실패하여 패배주의적 사고에 갇힌 그녀와 대조적으로 그는 그런 시험으로 도대체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 했다. 이런 부분에서 한국과 일본의 사회 분위기는 서로 다른 것일까. 이것이 문화차이일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야마모토 히로아키의 집은 못 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3대 도시를 대표하는 곳에서 나름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족경영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역 유지였다. 비로소 그녀는 그가 대만에 오자마자 어떻게 과감하게 오토바이를 살 수 있었는지, 본인처럼 돈을 아끼기 위해 기숙사에서 굳이 생활하지 않고 좋은 집에서 자취를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심지어 지안은 해외를 처음 간 곳이 지금 이 대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셀 수도 없이 아시아 위주로 많은 외국 여행을 했고, 드디어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만에 와서 이렇게 사는 것이 일본에서 사는 것 보다 훨씬 만족스럽다고 했다.
애초에 돈이 없으면 유학을 할 수도 없겠지만, 대만 유학은 당시에 한국 등록금에 3분의 1 가격으로 굉장히 저렴한 편이었다. 그래서 여유롭지 못 한 그녀의 집에서는 한국 대학이나 재수를 다시 준비하는 것 보단 대만 유학을 보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고 적절한 선택지였다.
단, 그녀가 중간에 포기하는 일 없이 내년에 대학을 잘 입학해서 졸업까지 완수한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자신이 왜 대만유학을 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여행을 가도 놀아도 중간중간 죄책감이 느껴졌고, 그런 그녀를 그는 매우 흥미롭게 봤다.
" 걱정할게 없는데 왜 걱정하는거야? "
참 속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 진심으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자신과 다르게 대만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그 모습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가 같다는 공통점을 빼고는 집안 배경과 살아온 환경 등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같이 공부했던 교환학생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던 친했던 사람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점이 아쉬우면서도 씁쓸하면서도 스스로도 나중에 저렇게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잠깐 했지만 옆에 일본인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덜 외롭다고 느꼈다.
이제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서로 간단한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초반에 비해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즈음부터 전자사전을 더이상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이제 곧 외국인 전형으로 대학교 원서 접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느꼈다. 여기서 떨어지면 또 다시 1년 가량 입시를 준비해야 했고, 대만 학기제는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말이 1년이지, 이것이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국립대와 사립대의 학비는 사립대가 조금 더 비싸기는 했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숙사가 있는 대학을 가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국립대만 바라봤다. 그녀는 열심히 서류를 준비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그는 물어봤다.
" 너 무슨 학과 지원할거야? "
" 음.. 일문학과? "
그는 잠시 그녀를 뚫어져라 봤다. 그리고 이내 하하하 웃으면서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흐트리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 없는 것이 일본어라고 말이다. 일본인이 저렇게 말하니까 그녀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은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지원할 것이라며 학벌은 크게 상관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그나마 쓸모 있는 학과는 컴퓨터 관련인거 같아서 이 전공으로 선택하겠다며 그녀에게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쓸모 없는 일본어 말고 더 가치가 있는 학문을 전공하라며 조언했다.
그런데 그녀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사실 1년 조금 넘게 중국어로는 도무지 대학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졸업까지 하려면 그나마 대만 학생들과 견줄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 2외국어였다. 또 대만에서 일본어의 위상은 한국과 다르게 높기 때문에 대만 학생들에게도 무척이나 인기 있는 전공 과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사귀고 있는 이 일본남자의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가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어 배울거면 일본에 갈 것이지 굳이 대만에 왜 갔냐는 주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한채 소신 있게 일문과를 지원했던 것이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일문학과는 경쟁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을 한 것에 처음으로 대만에 온지 1년이 지나 이루어낸 성취감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더군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학비도 기숙사 비용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차피 자신이 지원한 학교와 학과에 지원할 외국인이 있겠냐면서 당연히 합격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어학당에서 만나 드디어 두 사람은 대만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유학생 신분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것이였다. 합격 소식에 평소에는 값이 나가 잘 먹지 못 했던 훠궈도 함께 먹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정확히는 그녀 혼자 가장 즐거워했다. 한참 음식에 집중하며 먹고 있는데 그는 그녀에게 뜻밖에 제안을 했다.
" 이번에 우리 부모님 만날래? "
" 내가...? 왜...? "
" 홍콩에서 같이 만나고 싶은데 너는 부담없이 오기만 하면 돼"
그게 어떻게 부담이 안 되는 일이야.. 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생각을 간파했다는 듯이 비행기 항공권이며 그는 여행에 들어가는 경비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쓸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어차피 대학을 합격했으니 해외 여행을 갈 명분도 마땅했다.
그녀는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면서 어떻게든 항공권 비용 값을 만들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이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 일본인 남자친구와 함께 홍콩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가족이 그녀를 홍콩으로 초대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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