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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로퍼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30

by 노루

내 기억 속 첫 차는 현대 갤로퍼였다. 우리 아빠는 내가 태어나던 해, 우리 가족이 4인 가족으로 정의되면서부터 갤로퍼를 몰았다. 나는 아주 작은 꼬마였을 때부터 갤로퍼를 보고 자랐다. 키가 1미터도 채 안 되는 꼬맹이에게 갤로퍼의 웅장함은 대단했다. 나에겐 갤로퍼가 한 마리 공룡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아주 크고 든든하고 거칠고 아늑한 공룡.


청록색의 갤로퍼는 햇빛 아래에서 유난히 푸르렀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마치 아빠의 청춘이나 다름없는 빛깔이었다. 캥거루 범퍼를 달고 타이어 스페어 없이 거친 실루엣을 지닌 그 시절 갤로퍼는 지금의 매끈한 차들이랑은 사뭇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캥거루범퍼를 밟고 곧잘 차의 본넷 위로 기어올라갔고, 우리 집 낡은 앨범에는 의기양양하게 차 위에 올라앉은 아가였던 내 사진이 있다.


갤로퍼는 아주 오랜 시간 우리 집 식구들의 이동을 책임졌다. 나는 그 갤로퍼에 여러 번 토하고 침 흘리며 잤다. 차만 타면 그렇게 잠이 쏟아질 수가 없었다. 달달거리던 승차감과 직물 시트의 냄새와 엄마가 넘기던 지도책의 팔락거리는 소리는 그 자체로 자장가였다.


갤로퍼에서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덜덜거리는 차체의 진동소리는 시동을 켜고 끌 때 특히 심했다. 덕분에 4층 주공아파트에 살 때도, 2층 연립에 살 때도 창 밖으로 차 소리를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 학생이 된 나와 오빠는 엄마 아빠가 외출하면 실컷 티비를 보고 게임을 하다가 그 덜덜거리는 차소리를 듣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문제집을 펼치곤 했다.


내비게이션이라는 게 처음 나왔을 때, 아빠는 우리에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며 일부러 동네 어딘가로 차를 몰고 간 후, 핸드폰에 대고 '우리~집' 이라고 말했다. 난 그 억양과 호흡을 아직 기억한다. 목적지로 안내하겠다는 음성을 들려주며 아빠가 아주 뿌듯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봤던 것까지.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좋아했다. 우와, 우와, 하면서.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30만 킬로미터를 넘게 달린 갤로퍼는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차체가 낮은 승용차를 탈 때면 머리를 부딪혔고 소리가 나지 않는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고 착각했다. 내가 아는 '차'라는 건 그런 거였으니까.


가끔 거리에서 오래된 갤로퍼를 볼 때가 있다. 내가 아는 그 소리를 내는, 내가 아는 그 청록빛의 갤로퍼를 보면 마치 어떤 지나간 시절을 만난 사람처럼 아련하고 애틋한 기분이 든다. 난 낡은 갤로퍼에서 젊었던 아빠를 본다. 틈만 나면 손세차를 하던 아빠를, 본넷 위에 날 번쩍 들어앉히던 아빠를, 백미러로 잠든 우리를 힐끔거렸을 아빠를. 그리고 아주 가끔 그 안에서 울었을 아빠를. 지금은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우리 아빠의 어리고, 푸르고, 강인했던 그날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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