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소설 읽는 걸 좋아해서 문창과에 들어왔어요

문창과 졸업생의 직장생활 적응기 01

by 노루

어릴 땐 애착을 둔 동화책이 있었다. 하나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삽화 속 엄마로 변신한 호랑이의 털북숭이 손에 들린 하얗고 동그란 떡이 예쁘고 탐스러워 그 떡을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그리고 [검독수리]. 동물을 설명해 주는 어린이 도감 중 한 권이었는데 커다랗고 호쾌하게 휘어 있는 검독수리의 발톱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었다.


이렇게 다소 난해한 기준으로 베스트 동화책을 고르던 다섯 살 어린이는 유치원 그림대회 상품으로 인생 동화책을 만나게 된다. [재롱이의 생일 케이크]. 생일을 맞은 강아지 재롱이가 직접 만든 못난이 케이크를 준비하고 잔뜩 기대하며 친구들을 기다리지만 밤이 되어도 친구들은 오지 않고, 실망한 재롱이가 친구들을 기다리며 한 조각씩 케이크를 먹어치워 빈 케이크 판만 덩그러니 남았다. 다음날, 슬퍼하는 재롱이에게 갑자기 친구들이 나타나 예쁜 제과점 케이크를 선물하고 다 같이 사이좋게 파티를 하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결국 재롱이는 자기 생일을 착각했던 걸까? 지금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1990년대 중후반의 어느 동화책이다.


이 동화책을 시작으로, 비로소 나는 삽화가 아닌 동화책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도서관 대출왕을 섭렵하고, 남들 다 공부하는 야자시간까지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읽기로 저녁을 뿌듯하게 보내는 청소년기를 지나게 된다. 반에 하나씩은 꼭 있는 학생이었다. 안경 쓴 얼굴에 질끈 묶은 머리, 조용하고 선생님 말씀은 잘 듣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성적은 뭐 그저 그런. 그게 나였다. 수능 언어를 본문의 문학작품 읽는 재미로 풀고, 1등급을 어렵지도 않게 가져왔지만 수리는 7등급에, 이해되지 않는 개념은 절대 외우지 못했던 학생 시절의 나. 남들이 하도 '너는 어떻게 앉은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니'라고 신기해해서 그게 대단한 재능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땐 일기장 구석에 선생님이 이런 글을 자주 써 주셨다. '우리 OO이는 일기를 참 잘 쓰는구나.' 고등학교 수행평가로 낸 단편소설은 친구들 앞에서 읽히는 영광을 누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문학 선생님이 '글을 써 보는 게 어떠니?' 하고 물으셨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고 그저 나는 글을 잘 쓰나 보다 생각했다. 나는 칭찬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누가 뭘 잘한다고 해주면 그게 그렇게 한 줄기 빛 같고 그랬다. 국문과, 영문과, 그리고 글 쓰는 학과라고 해서 문창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문창과만 예비 5번이 나오고 다 붙었다. 그래도 영어보단 국어지, 하고 국문과에 등록해 신입생 환영회를 갔다. 술도 먹고 놀고, 웃고, 게임도 하고 막 바쁘던 와중에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문창과에 추가 합격을 했단다.


그래도 문창과를 지원한 학교가 더 알아주던 학교라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집에 전화를 하니 엄마 아빠는 발을 동동 구르고, 동네에서 놀던 오빠가 집에 부리나케 뛰어들어와 인터넷으로 절차를 처리하고 취소하고 입금하고 뭐 정신없이 바빴다. 남의 학교 신입생 환영회 레크리에이션장 바로 앞에서 애타는 얼굴로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다. 선배들이 무슨 일 있냐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얼굴로 하루를 더 자고 가까이 지냈던 애들한테도 끝내 말을 못 하다가 학기가 시작돼서 문자로 겨우 말을 꺼냈다. 나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됐어.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꽤 극적인 대입 후기다.


남의 학교 행사에 가느라 내 학교 행사를 못 가서 동기들에게 나는 갑자기 나타난 애가 되어 있었다. 시간표는 인기가 없어 자리가 남아있는 수업으로만 짜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다 진행은 되더라. 선배들이 몇 번이나 왜 문창과에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나도 몇 번이나 대답했다. 저는 소설 읽는 걸 좋아해서 문창과에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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