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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빠다

by hohoi파파

2015년 가을,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따사로웠다. 비몽사몽 졸린 눈을 비비며 베란다로 나갔고 스티로폼에 심어 놓은 상추에 물을 주었다. 상추 모종은 옥상 텃밭에 관심 있었던 지인이 준 것이다. 사실 그해 중학생들과 텃밭 가꾸기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 상추 키우는 것에 나름 자신했다.


상추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새끼손가락만 한 상추 잎이 금세 손바닥만 해졌다. 잎이 커지고 색깔이 짙어질 때마다 뭔지 모르게 뿌듯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아내에게 잎이 무성한 상추를 보여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내는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어이없어하며 내다 버리라고 했다.


상상해 봐라. 남편이 아침 댓바람부터 부스스한 까치 머리를 하고 눈곱 낀 눈으로 상추에 물을 주는데, 어떤 심정이겠는가. 상추를 보고 마냥 신이 난 것과 달리 아내 눈에는 지지리 궁상떠는 모습에 불과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렇지 않아도 좁은 베란다에 상추 모종까지 들여놨으니 상추 모종은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골칫거리였다. 내 눈에는 정성 쏟은 만큼 자라는 자식 같지만, 아내 눈에는 단지 쌈 싸 먹는 상추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에 나가 상추에 물을 주었다. 아내는 평소와 달리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이상한 낌새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아내의 반응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날도 상추에 물을 주고 있는 나를 보고 한심하게 쳐다봤으니 말이다. 상추에 물을 다 주고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아내의 눈이 심상치 않다. 눈을 위아래로 흘겼다. 순간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속으로 그만 상추를 버려야 하나 싶을 때. 아내는 무언가 쓱 내밀었다.


“이거 봐봐”


임신 테스트기다. 임신 테스트기를 눈앞에 두고도 아내가 왜 보여주는지 이유를 몰랐다.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눈치 없는 남편이다.


그제야 임신 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나 있는 두 줄이 보였다. “두 줄?” 화들짝 놀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속으로 임신인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아내를 바라보며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임신 테스트기와 아내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이제 상추 자식 키우지 말고, 네 자식 키워!”

“진짜 임신이야? 임... 신...이라고?"


아내는 답답했는지 눈만 끔뻑거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한마디 했다. 아내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실망한 듯 보였다. 임신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자 아내는 경멸했다. 아내와 달리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아내는 제 차 임신했다고 말했다.


"임신이라고! 임신이야!"


우물쭈물하다 그만 쭈글쭈글해졌다. 아내에게 점수 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서운하게 했던 것 같아 지금도 후회된다. 만약 다시 아내가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었을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예비 아빠 리액션을 제대로 보여주리라. 환호하면서 물개 박수를 칠 테야.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아내를 따뜻하게 안아주겠다.


지금이라도 글을 빌려 아내에게 고마웠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여보! 당신이 처음 임신이라고 했을 때 속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어.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에 놀란 것은 사실이야. 아직도 아빠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네. 잘 키워보자. 고마워, 사랑해!”


나도 아빠다. 이제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얼떨떨하다. 솔직히 예상치 못한 임신 소식에 기쁘기도 하면서 덜컥 겁부터 났다. 아빠로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리저리 맴돈다. 그나마 처음부터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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