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출동] 산악구조
눈 온다고 신나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옷은 점점 얇아져 어느새 반팔을 입고 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지금 이 정도인데 8월은 얼마나 더울지 두렵다. 폭염주의보가 내려도 부르는 이가 있다면 출동에 임해야 하는 게 소방이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미리 일처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할지역 건축물의 화재경보설비가 잘 작동하는지, 소방차가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은 충분한지 미리 확인하고 다녔다.
여름이 되기 전에 꼭 마쳐야 할 업무는 사실 따로 있다. 구급함 점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등산로엔 구급함이 설치되어 있다. 응급상황에선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게, 소방서에서 주기적으로 내용물을 채워 넣고 있다. 취지는 좋으나 구급대원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존재이다. 사용률이 저조할 뿐만 아니라, 점검하러 가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구급함을 사용한 사람을 딱 한번 본 적 있다. 그때도 오늘 같은 날씨였다. 따스하지도 따갑지도 않은 약간 뜨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시원하지도 후덥지근하지도 않은 약간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창고에 있던 선풍기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는 5월 말, 산악구조 출동이 내려졌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은 모두 구급대에게 안타까움을 표했다. 산악위치표지판을 미리 검색해보는데, 연발 한숨만 나왔다. 구조대원들은 차고로 달려가면서, 오래간만에 운동 좀 하겠다고 들떠 있었다.
산 진입로를 찾는 데에만 10분이 걸렸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코스인 데다가, 구급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연성 부목(soft splint)과 붕대(bandage)를 챙겨 등산로에 진입했다. 구조대원들은 즐거운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질러갔다. 내려오는 등산객을 잡고 약수터의 위치를 물었다. 30분은 더 가야 한다는 말과 방금 떠온 물을 건네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환자는 약수터에서 5분 거리에 있다고 했으니 족히 35분은 더 걸어야 했다.
산을 오르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날씨엔 그냥 집에 계시지’부터, ‘진짜 운동 좀 해야겠다’, ‘이러다 내가 쓰러지는 건 아닌가’, 심지어 ‘구조대가 준비한 몰래카메라인가’하는 의심도 해봤다. 아이스크림 내기를 위해 사다리타기를 제안해 놓고, 진짜 사다리를 펼쳐서 누가 빨리 오르나 대결하는 구조대원들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였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약수터에 도착했다. 물 마실 틈도 없이 구조대가 환자를 찾았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지난겨울엔 약수터까지 뛰어와서 구급함을 채웠는데, 지금은 왜 이러나 싶었다. 그래도 다 왔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구급함이 열려있음을 알아차렸다. 누가 썼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이걸 채우러 다시 올라와야 한다 생각에 눈물이 났다.
환자는 자리에 앉아 구조대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환자의 발목을 살피는데, 이미 응급처치가 되어있었다. 일반인이 한 것 치고는 붕대로 압박이 잘 되어있었고, 어디서 구했는지 철사 부목(wire splint)으로 고정도 잘 되어있었다. 환자에게 의료계에 종사하시냐 물었더니 옆에 있던 구조대 막내를 가리켰다.
“저 총각이 해줬어요.”
하여간 얄미워 죽겠다. 먼저 올라와서 환자 안정시키고 처치해준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좀만 기다리면 될 것을 괜히 구급함을 열어서 다시 채우러 올라오도록 만들었다. 분명 알면서도 일부러 꺼내 쓴 것에 틀림없었다.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는 게,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를 구조대 막내가 업고 내려왔다. 헥헥대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롭게 하산했다.
오늘도 구조대원들은 출동벨만 들리면 쏜살같이 구조차에 올라탄다. 단순히 주인 없는 개를 구하러 가는 출동이든 수난구조 출동이든, 날이 덥든 춥든 한결같이 뛰어다닌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저런 한결같은 태도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데 꼭 필요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숨이 차지만, 구조대원들에게 배운 점을 생각하며 구급함을 채우러 묵묵히 산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