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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현 Dec 27. 2018

사람 살리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화재출동] 아파트화재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무더웠던 지난여름.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씨가 며칠간 이어졌었다. 하늘에 걸린 해를 누가 훔쳐갔는지 날은 밝아질 생각을 않았다. 습한 공기는 야간 근무로 피곤해진 마음을 괴롭혀 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방서에서 나와 우산을 폈다. 집 앞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나오는 데, 자동문 옆에 놓아둔 우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 숨 쉴 기운도 없었다. 말없이 모자를 둘러쓰고 집으로 향했다. 신호등은 왜 그리 긴지, 옷은 비에 젖으며 점점 더 무거워졌다. 봉투가 비에 젖을까 품에 끌어안는데, 우산을 쓴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옆에 섰다. 내 우산이었다. 입을 열려던 찰나에 아주머니는 길을 건넜다. 나는 가만히 서서 신호등을 한번 더 기다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소방서에서 온 전화였다. 왜 휴대폰 들고 갔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구급차 휴대폰을 가져와버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 카페에 앉아있으니 금방 가겠다는 말을 전하고 옷을 입었다. 휴대폰을 챙기고 신발을 신는 데 우산이 없음을 알아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아까 벗어 둔 젖은 옷을 다시 입고 집을 나섰다. 


  소방서에 도착하니 차고가 텅 비어 있었다. 모두 출동 나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에 화재 출동이라니. 젖은 손을 닦고 지령서를 확인했다. 아파트 화재니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주공 아파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방서에서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빨리 쉬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주소를 휴대폰에 옮겨 적고, 출동 장소로 향했다.



  불은 완전 진화된 상태였다. 베란다 쪽에서 흰 연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지만 빗줄기에 금방 지워지고 있었다. 정차된 중형 펌프차에서 모자를 빌려 쓰고, 불이 난 4층으로 발을 돌렸다. 계단은 위에서 흘러내려온 새까만 물로 흥건했다. 3층에 다다르자 구급대원이 보였다. 언성 높여 싸우고 있는 남녀도 보였다. 휴대폰을 전달하며 자초지종을 들었다. 아내와 싸운 남편이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장마철 무렵 줄어든 일용직 자리에 한껏 예민한 상태였다고 한다.


  연기로 인해 얼굴이 검게 변했을 만큼 두 분 모두 병원 이송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격앙된 남녀에게 구급대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수 차례 병원 이송을 권하자 아내는 병원으로 향했지만, 남편은 자신의 집을 떠날 수 없다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환자 본인이 거부할 시에는 구급대가 강제로 병원 이송할 수 없다. 이송은 못하더라도, 화재현장으로부터 안전한 1층까지 내려 보낼 필요가 있었다.


  밑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내려오라는 말을 건네고 먼저 내려가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남편 분은 제 발로 걸어 나오셨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신원조회를 위해 곧바로 남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남자는 토해내듯 크게 소리쳤다.


“꺼져 제발. 너네들 실적 올리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인명 구조하고 병원 이송했다 자랑하고 싶어서 나 데려가려는 거 다 알아”


  남자는 말없는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진정시키기 위해 경찰들은 한발 물러섰다. 남자의 얼굴은 재와 빗물로 얼룩져 있었다.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경찰과 함께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 숙이고 앉아있는 그를 설득하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버님, 비도 오는 데 안에 들어..”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뺨을 후려쳤다. 경찰은 곧바로 남자를 제압해 수갑을 채웠다. 얼얼한 뺨 위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구급대원들이 내게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하루 종일 멍했던 정신이 이제야 돌아오는 것 같았다. 빗물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천천히 되짚었다. 정신 놓고 구급차 휴대폰을 실수로 가져간 점, 우산 없이 비를 맞아 건강관리를 잘 못한 점, 근무도 아닌데 현장까지 찾아온 점, 환자를 걱정해 병원 이송을 권한 점.


  모자를 제자리에 두고 집으로 향했다. 아까 멈추어 섰던 신호등에 또 걸렸다. 한 번쯤은 바로 보내줄 법도 한데, 하늘도 참 야속하다. 집에 들어와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우니 합격증을 담은 액자가 보였다. 자랑스러움을 가득 안고 걸어 놓은 액자였다. 마무리하지 못했던 고민이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잘못한 건 소방서에서 근무하겠다 다짐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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