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출동] 과호흡
소방서의 막내인 나는 대부분의 잡일을 도맡아 한다. 밥을 짓고, 반찬을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마트 심부름을 하고. 시키지 않은 일이라도,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한 시 먼저 움직인다.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목마른 벼처럼 축 늘어진다. 이렇게 바쁜 나를 격려하고 도와주시는 선배가 소방서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달에 승진을 하셨다는 게 그 이유다. 승진하실 당시엔 ‘역시 하늘도 마음 착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내 일같이 기뻐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되자 걱정이 가득했다. 선배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저녁에 나를 불러다 뒤뜰 벤치에 앉혔다. 늘 피우시던 담배를 꺼내며, 함께했던 옛이야기를 꺼냈다.
찬 기운 가시고 따뜻한 내음 올라오는 봄날이었다. 출동 장소는 소방서 인근의 한 기차역이었다. 과호흡(hyperventilation) 환자. 생소한 병명이지만, 말 그대로 호흡을 과하게 하는 증상이다.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나 대부분 강한 정신적인 충격이 원인이다. 의식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끝난다. 환자는 기차 안에 있으며, 환자와 통화를 하던 신고자는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퇴근시간의 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들것을 챙겨 올라가는데 발 디딜 틈이 없다. 다들 바쁜 일 가득한 차가운 표정으로 빠르게 앞질러 간다. 엘리베이터에 들것을 넣으려는데 아무도 자신의 공간을 양보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배에게 들것을 맡기고 나는 걸어서 올라갔다.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기차가 들어섰다.
신고자인 남자 친구와 함께 8-2 칸에 들것을 놓고 기차가 멈추길 기다렸다. 출입문이 열렸으나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여자 친구를 찾으러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급하지 않고 매우 침착했다. 뒤따라 들어가려는데 옆 칸인 8-3에서 젊은 여성 한 분이 내렸다. 굽어진 등을 보니 우리가 찾던 환자인 것 같았다. 억울한 듯이 거칠게 내쉬는 숨, 순간적인 마비로 인해 구부정해진 몸, 그렁그렁 맺힌 눈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단 거동이 가능했다. 남자 친구와 부축하여 바로 앞의 대합실로 들어갔다.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하기는커녕, 이상한 눈으로 환자를 쳐다보았다.
사실 과호흡 환자에게 구급대원이 할 일은 크게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은 비닐봉지를 입 주변에 갖다 대어 재호흡을 촉진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농도 조절 등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더러 제기되면서 지양하게 되었다. 단지 환자를 최대한 안정시키고, 숨을 깊고 천천히 쉬도록 설득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황할 법 하지만 남자 친구는 침착하게 우리를 도왔다. 그의 호흡은 정말 차분했다. 익숙한 듯 환자의 손을 감싸고 어깨를 토닥거리며, 천천히 눈을 맞췄다.
선배가 산소포화도와 혈압을 체크하는 동안, 환자의 과거 병력(history)을 조사했다. 공황장애를 겪어 약을 먹고 있다고 남자 친구가 대신 답했다. 그러곤 환자의 안정을 돕기 위해 대합실 내의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몇 마디의 짜증과 함께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대합실엔 그와 그녀의 호흡만 존재했다. 활력징후가 모두 정상임을 확인한 후에, 나와 선배는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시선을 거두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지고, 주황과 연분홍 사이 어딘가의 따뜻한 색을 띠고 있었다.
환자의 호흡은 서서히 돌아왔다. 마비되었던 손발도 천천히 돌아왔다. 단단하던 손을 놓지 않던 그의 체온이 잘 녹여내었나 보다. 환자의 상태로 보아 병원 이송은 불필요한 것 같았다. 지금 서 있는 이 기차역에 저 둘만 남겨두고 조용히 나오고 싶었다. 둘만의 시간 속에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그 어떤 특별한 말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진심을 전할 두 손과 조용히 앉아 시간을 공유할 공간, 그리고 이들을 감싸 안아줄 따스한 풍경. 그거면 충분했다. 앞으로 어떤 고난들도 함께할 것 같은 한 쌍을 본 기분이었다. 선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내게 눈빛을 보냈고, 대기실 문에 메모를 남겨두고 조용히 나왔다. 아직 세상은 따뜻함을 느꼈다.
선배는 언제나 그랬듯 재떨이를 깨끗이 치우며 말했다.
“세상 참 바쁘게 돌아간다. 하고 싶은 일에 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많고, 쉼 없이 계속 달리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그 탓에 이렇게 승진한다. 승진해 봤자 뭐하나, 좋았던 사람들과 인사해야 하는데. 너는 좀 천천히 걸으며 오랫동안 함께 해라. 소방관은 매일 연기 마시니 금연도 소용없다지만, 넌 담배 절대 피우지 마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세상 사람 모두 과호흡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왜 갑자기 이러는지도 모르고, 그렇다 할 해결 방법도 없다. 너무 숨 가쁘게 움직인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이다. 그와 손을 잡은 그녀처럼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자신의 쉼, 자신의 숨을 되찾는 것. 숨을 쉬는(休) 것. 그거면 된다.
이상으로 매거진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을 마감합니다. 본 계정은 추후 다른 분야의 게시물(의학/영문학/물리학 자료)을 발행할 예정이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랑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