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부터 시작해 각종 감정의 찌꺼기가 그대로 고인 고시원의 내 방은 눅눅하기 짝이 없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빨래를 널어놓을 수 있는 빨랫줄이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나의 옷을 널어놓지 않았다. 속옷부터 시작해 내가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이 다른 사람의 옷과 맞물려 펄럭이는 모습은 왠지 불안했다. 속옷이 사라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내가 모르는 사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무방비의 상태로 길거리를 구를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좁은 고시원 방에 나의 빨래를 널고, 그로 인해 생긴 곰팡이와 함께 살았다.
외로움이 커지는 만큼, 곰팡이는 늘어갔다. 천장에서부터 시작된 곰팡이는 점점 아래로 내려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나는 신경 쓸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에 대한 압박, 넓고 시끄러운 서울에서 홀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잘하고 있다는 얄팍한 희망의 챗바퀴를 매일 달리고 또 달렸다.
참을 수 없는 날엔 봤던 영화를 또 봤다.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 원하는 맥주를 사들고 올라와 그것을 꾸역꾸역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또 봐도 또 슬펐고, 잔잔했다. 나는 그렇게 새벽을 보내며 다음 날 내가 무엇이 되어있을지, 되어있기는 할는지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르는 전화번호는 전혀 받지 않던 나였지만, 그 시절엔 여러 군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뜻 전화번호를 읊고 다녔기에 어디에서든지 전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국제전화부터 시작해 나에게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받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멍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때였다. 곰팡이가 그리운 얼굴들을 피워냈다. 엄마부터 시작해, 동생과 강아지와 어렴풋한 아빠와 친구들의 얼굴을 두서없이 떠올리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고시원은 방음이 잘 되지 않아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다수였기 때문에, 나는 전화가 울리면 늘 옥상으로 올라가곤 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사람들이 맞은편 건물의 창 안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의 목소리에 안녕하세요, 정중한 답이 돌아왔다. 네, 안녕하세요. 누구신가요? 더불어 정중히 받았을 때 그는 말했다. 간단한 설문조사를 준비 중에 있는데, 혹시 응답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는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목소리도 낯설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하셨죠? 내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문항을 읊었다. 자신이 읊는 문항에 해당하는 답을 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마침 무료했던 나는 무슨 설문조사인지 묻지도 않은 채, 등을 기댔다. 옥상은 한산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팬티가 아슬아슬하게 날리고 있었다.
최근 성관계를 언제 해보셨나요? 한 달이면 일 번, 반년이면 이번,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면 삼 번을 말해주세요.
남자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설문조사인지, 이게 내가 답을 해야 하는 문제인 것인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남자는 나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남자의 주변은 조용했다. 그는 모두가 퇴근한 어느 사무실에서 이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설문조사이고 나발이고 그저 본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그는 내가 답하는 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흥분할까? 그러기 위해서 이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걸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정적이 길어지자, 그는 답을 재촉했다.
제가 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근데, 이게 무슨 설문조사죠? 나의 말에 그는 삼 번이라 생각하겠다고 말한 뒤, 다음 문항으로 넘어가겠다고 말했다. 삼 번? 삼 번이면 한 번도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답이 될 텐데,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곤 '아, 이 사람은 한 번도 성관계를 가진 적 없구나.' 판단한 것일까? 어떤 부분에서? 나는 괜히 분했다. 그런 와중에, 다음 문항이 들려왔다.
성관계를 즐기는 것에 최적화된 장소는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일 번 자취방, 이번 여관이나 모텔, 삼 번 야외.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에게 왜 웃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이 남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런 전화를 하고 다니는 것이라 여겼다. 이 사람도 삶이 심심했던 걸까. 이렇게 여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하루가 충만하다고 느끼는 사람인 걸까. 미친 사람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끊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그 순간, 심심했고, 오랜만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화를 끊지 않았다. 다만,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게 왜 궁금하시죠?
설문조사의 일환입니다.
설문조사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어느 기관에서 진행하는 건데요?
…….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 무작위로 누른 전화번호입니다.
전화를 걸었을 때 여자가 받으면 그대로 이어가고, 남자가 받으면 끊으시는 건가요?
네.
왜죠? 남자들도 분명 성관계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이고, 설문조사라 함은 성별 구분 없이 다양한 답을 얻어야 득이 될 텐데요.
그냥 대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대답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 혹시 제가 아는 분이신가요?
상대는 말이 없었다. 한참 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전화번호는 무작위로 걸었던 겁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말했다. 이런 전화는 불쾌해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전화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러다 잡혀가요. 내 말에 남자는 불쾌하게 만드려고 한 전화는 아니었다고 답했다. 남자의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나는 더 듣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 끊겠습니다, 저를 포함해 다른 여성분들에게도 이렇게 전화하지 말아 주세요. 나의 말에 그는 불쾌하게 만들 의도는 아니었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더 답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전화를 끊고,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한동안 옥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전화를 건 이가 나와 아는 사이라면 어쩌나, 이미 내 전화번호를 알았으니 다른 전화로 전화가 오는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리 걱정되진 않았다. 다만, 방구석에서 이런 전화를 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는 참 외로움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구나, 나는 건전한 사람이구나, 그 덕분에 나는 나의 외로움을 대하는 행위를 높이 평가했다. 웃음이 났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혼자 중얼거렸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식으로 발산할지는 자신의 몫이다. 외로움은 우리가 한 단계 더 다른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감정인 것 같지만, 비어있던 바닥의 틈에 스며들며 그 바닥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외로움, 고독일 것이다. 잘 써먹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감정이란 없으니까. 음란전화가 반가울 뻔했던 어느 날, 나는 그래도 내 정신이 건강하다고 느꼈다. 옥상에서 내려오며 나는 그가 조금 더 건강한 외로움을 느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