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돌보지 않던 광기 "조커"

광적인 웃음에 묻은 슬픔이 더 깊었던 건

by 성운

윤동주 병원 中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어제 일을 할 때 현장에서 내 옷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나는 어떤 것을 탓해야 하나 싶었다.

생각보다 더웠던 날씨와, 하필 그곳에 옷을 벗은 나의 선택과, 아니면 내 옷의 위치를 옮긴 그 무언가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아마 기억의 기억을 더듬을 것이다. 나는 어디엔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을 마친 뒤 다시 놓았던 자리로 왔었다.

물건에 발이 달려 있지 않을 테니.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잘 못 기억하고 있거나, 누군가 물건의 위치를 옮겼거나.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모르겠지만 50:50으로 나의 탓과 주변 환경의 탓을 했다.

처음엔 내가 왜 기억도 못하는 곳에 옷을 벗었지 라는 생각과 뒤이어 가지고 갈게 없어서 옷을 가져갔나

라는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 잘못을 합리화했다.


그리고 오늘, 택시에서 내릴 때 가방을 놓고 내렸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방에 든 건 책 한 권과 c케이블과 보조배터리였는데, 가방을 잃어버린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가방이 꽤 낡아 있어서 아마 메고 다니긴 좀 그럴 것이다. 아마 버리지 않을까?..

2015년 회사에서 받은 상품권 20만 원으로 산 빈폴 백팩이었다.

차태현이 드라마에서 메고 나와 인기 있는 모델이었다.

사실 처음 사고 나서 메고 다닐 땐 별로였는데, 다른 가방을 사기는 그렇고 해서 매일 메고 다녔다.

4년이 지난 오늘은, 늘 메던 가방을 메고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출근을 하기위해 택시를 잡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고, 계속해서 시간에 신경이 쓰였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택시에 탔고, 조금 늦은 지각을 염려하며 도착지에 내렸지만, 가방을 메지 않았다는 걸 1시간 뒤 알게 되었다.

바로 기사님께 전화를 했지만 알 수 없다는 답변이었고, 혹시 모르니까 찾으면 연락을 달라는 문자메시지는 공허했다.


이틀 연속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나의 책임이었다. 세상은 슬프게도 내 책임을 돌보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얻었을 테니,

또 모르겠다. 내가 잃어버려 놓고 애꿎은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뭔가 괴로운 감정이 든다.

아무튼 물건은 떠나갔다. 나는 또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 인생이 그러지 않는가.

누군가는 소비하고 누군가는 소비를 위해 생산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 사장, 동료, 그리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까지 모두와 함께.

내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고 좌절과 용기가 교차되고 만남과 이별을 맞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고, 다 불공평을 탓하며 살아간다.

그 틀 안에서 우리는 조그만 행복과 관심과 위로의 말 한마디가 필요하겠지.

영화는 바로 이 점으로 조커를 잘 그려냈다.


나는 이 글에서 한 인간의 잔인한 폭력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가 조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비판할 수는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너지는 개인의 환경 속에서 나는 조커를 잠깐이라도 응원했었으니까.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지만 죽음이 가지는 슬픔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재판 과정에서 권총으로 아랍인을 살인한 것보다 더 비난을 받은 것은 그가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슬픈 것을 적는 것이 꽤 이상한 일이지만, 뫼르소에게 설명하자면 죽음 이후엔 이제 그 사람과 더 이상 기억할 거리와 더 이상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대화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나라는 존재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당신의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슬프지 않은가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뫼르소는 왜 슬퍼해야 하는지 물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나이대로 죽은 것이며, 아랍인들은 태양 때문에 짜증 났고 마침 권총이 있어 그들을 향해 쏜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실존한다. 사람은 사람의 나이로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도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슬픈 것이고, 권총은 나를 보호하거나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에게 슬프지 않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거나 -장례식 참여, 권총으로 살인을 하는 일-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조커는 카뮈의 이방인이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었다.

아서는 고담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회적 약자라고 볼 수 있는 희귀 정신병을 가지고 있고, 광대 분장을 하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파는 일을 한다. 동료들에게도 사장에게서도 사정은 그리 좋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머레이를 동경하며 코미디언을 꿈꾼다.

또한 마지막까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아서의 끈이자, 불행 속에서도 행복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사랑, 희망도 그를 붙잡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많은 위협과 조롱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불친절하며 무례하고 무시한다.

사회 시스템은 그를 보호하고는 있지만, 그런 척을 한 것이었고, 언제나 그랬듯 그에게는 좌절만을 안겨준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데 익숙하고, 때로는 자신의 병을 알리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자신보다 약한 존재이거나, 조금 다른 구성원을 신경 쓸 사람은 없다.

가만히 지나치면 오히려 다행이지만, 조롱거리로 다루거나 괴롭히기 시작한다.

아서가 조커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로 정당화되는 과정을 그렸다.

과정이 엄청나게 현실적인 판타지인 것은 알지만 영화 조커에서는 위험하게도 현실적으로 잘 그려내며

잘못된 선택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공감이 가도록 그렸다.

그러니까 조커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대사 한 줄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동작 하나, 광기 어린 웃음, 광대 분장을 쓴 그들이 조커에게 보내는 환호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새 사회는 노오력이란 말이 신분적 차별의 단어로 쓰인다. 또 누군가를 조롱하기 위해 쓰이거나,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세상은 개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때로는 우연의 법칙들이 잘 맞아 떨어지면서 한 세계의 공간은 크게 뒤틀린다. 아서는 우연히 권총을 얻었고, 하필 그 날 직장에서 잘렸고, 그리고 취객에게 조롱 당하던 여인 대신 폭행을 당했고, 정말 최대한 양보해서 정당방위라고 쳐서 권총으로 사람 두 명을 죽였다.

그리고 절대로 양보하지 못할 행동인 도망치는 사람 한 명을 끝까지 쫓으며 살인을 한다.

그렇게 선을 넘은 아서는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조롱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적인 체험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바로 제어되지 않은

제어 하지 못한 광기의 존재 끔찍한 조커의 탄생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머레이가 될 수 있다. 누군가를 비웃고 짓밟으며 자신의 위치를 유지한다.

공리주의를 이유로 소수보다 다수를 위한 생각을 하는 것이 정의라면

소수와 다수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정하는 것인지

그렇게 외치는 정의는 누구의 편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조커는 처음 살인을 했던 금융사 직원들을 안 죽일 수도 있었다기보다

금융사 직원들은 조커에 의해 안 죽을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친절했더라면, 조금 더 귀 기울였다면, 조금 더 인정했다면.


아서가 태어난 이유는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조커가 태어난 이유는 그들을 웃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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