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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늬 Aug 12. 2020

똥으로 날 웃게한 건 니가 처음이야

episode 3. 강아지 싱글맘의 일상



똥으로도 날 웃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치더라도 혼자서 강아지를 키우는 게 가장 힘들다고 느껴지는 때는 갑자기 강아지가 아픈 날이다. 요새 장마가 길어지고 날이 습해서인지 아픈 강아지들이 많다고 하더니 건강하던 동오도 갑자기 안 하던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1~2회 정도 하는 설사는 사료와 간식을 줄이고 지켜보는게 좋다고 하길래 우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는데 새벽녘에 동오가 설사를 3번이나 했다. 원래 집에서는 배변을 절대 안 하던 녀석이라 상황이 꽤나 심각해보였다.(얼마나 급했으면 집에서 했을까..)걱정되는 마음에  또 똥 폭탄 맞은 집을 청소하느라 그날 밤은 꼴딱 새운 것 같다.


밤을 꼴딱 새운 탓인지 단골 동물 병원 오픈 시간이 제대로 기억나질 않았고. 병원 오픈 시간을 착각했다.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운전도 못하고 자동차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켄넬에 동오를 넣어 택시로 이동해야만 했다.


동오 무게 8kg, 켄넬 무게 5kg 총 13kg는 팔 근육이 없어서 클라이밍도 포기한 나에게는 너무 무거운 무게였다. 심지어 켄넬 안에서 동오가 사정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켄넬을 들고 이동하는 것이 더욱 쉽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우산 쓸 손이 없어 비를 쫄딱 맞아가며 간신히 병원에 도착했는데 동물병원 문은 닫혀 있고 오픈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다(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이란..)


당연히 동오가 첫 번째 환자겠지 싶어 병원가서 바로 풀어 놓을 생각으로 동오 목줄도 안 하고 왔는데.. 켄넬에 동오를 오래 놔두면 평소 켄넬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동오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우선 병원 근처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다행히 아침시간이라 상가에 사람이 없었고 동오를 켄넬에서 빼내 품에 안은 채로 계단에 쪼그려 있었다.


동오는 평소에 안겨 있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동오를 안고 한 시간을 어떻게 기다리지..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올까 싶다가, 택시비도 아깝고 다시 한번 켄넬 옮길 생각이 까마득해 어떻게든 한 시간을 버텨보기로 했다. 아침에 씻지도 못해 머리는 떡지고, 옷은 엉망진창이고 덥고 습한 상가 계단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괜시리 억울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럴 때 병원에 같이 와 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내가 운전을 잘했으면, 차가 있었으면 아, 나는 왜 이렇게 동오에게 부족한 보호자일까?'


'동오가 아픈 건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상황에서 내게 위로가 됐던 건 웬일인지 오늘따라 팔 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동오와 몸으로 느껴지는 동오의 따뜻한 체온이었다. 동오를 안고 덥고 습하고 어두운 계단에 앉아서 보낸 한시간이 이상하게도 몽롱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본능인지 나란 사람의 본능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약한 존재를 보면 무모한 책임감 같은 것이 생긴다. 이 존재를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고야 말겠다는 이상한 책임감 말이다.


다행히 동오는 상가 계단에서 나에게 안긴 채 한 시간을 얌전히 버텨줬고, 설사의 원인은 큰 병이 아니었고, 동오는 항생제와 유산균 처방을 받은 뒤 하루 만에 황금똥을 싸 나를 웃게 만들었다.


강아지는  이상한 존재다.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들다가다시  용기를 내게 한다.

똥으로도 나를 웃게 만들  있는 세상 유일한 존재,

작고 따뜻한 이상한 나라에서 온 동오


성냥팔이 소녀처럼 상가에서 기다린 한시간

수민

강아지 동오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본업은 기획자, 부캐는 동오 언니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instagram : sumsumi_n


동오

진도 믹스 시 고르자브종 스트릿 출신 강아지

동네에 모르는 사람과 강아지가 없는 핵인싸견

하루에 두 번 산책해도 지치지 않는 개너자이저

유전자 구성이 다른데 왜 언니랑 성격이 같은지 미지수

@instagram : dogdon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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