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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걸음. 엄마, 날 따라와

끝은 끝이 아니야

by 모모



두 달 전, 이사 갈 집을 계약하던 날.

남편과 나는 일본어 토씨하나 놓칠세라, 바짝 긴장한 채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기나긴 조항 설명이 끝나고 도장까지 찍고 나니, 꽉 조였던 허리띠를 풀은 듯 힘이 쭉 빠졌다.

타지에서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남편과 자찬의 눈빛을 주고받던 그때, 전 집주인 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겨우 끝났네요. 자녀분이 몇 살이었죠?"

"네,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요."

"1년 조금 넘게 남았네요.

그럼 학교는 그 공원 앞에 있는 곳일 텐데, 거기 깨끗하고 좋아요.”


학교?


잊고 있었다.

어쩜, 다섯 살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이사를 결정하는데 학교를 알아보지 않았을까. 내 집마련에 정신이 팔려 아이를 깜빡했던 걸까? 아니면, 남은 1년의 어린이집 등원을 걱정하다, 학교는 까맣게 잊은 걸까?

아니지. 애초에 학교는 걱정거리 축에도 끼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쿄의 구립 초등학교야 어디든 비슷비슷할 테고, 위치는 더 상관없다. 도보 한 시간을 걸어서 등원도 했는데, 어디든 못 가겠어?


그날 저녁, 뒤늦게 초등학교를 찾아보았다.

이사 갈 집은 '제일초등학교(小学校)'의 통학구역에 속해 있었다. 제일초등학교를 검색하면 나오는 말들. 신축, 잔디 운동장과 최신식 수영장, 19시까지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대형 돌봄 교실... '얻어걸린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에 쓰는 걸 거다.


그리고 거리는—

집에서 도보…5분.


5분? 천운 중의 천운이다. 4년 동안 수행하듯 걸어온 나에게 하늘이 수고했다고 상을 내렸나 보다. 전 집주인은 그 기쁨을 미리 알려주러 온 메신저일 테고.


'진짜 해방이다!'





새 집에서 3킬로미터 등원을 시작한 지 두 달이 흘렀다. 걷기-버스-걷기 3세트의 경기, 아니 등원길이라, 한 구간만 늘어져도 시간은 배로 길어진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나오는 자판기마다 멈춰 서서, 좋아하는 과일 음료가 있나 없나 한참을 들여다봤다. 음료 수사대 활동이 끝났나 싶더니, 이번엔 자판기 옆에 핀 유채꽃, 수선화, 무스카리… 꽃은 또 어찌 그리 잘 아는지, 하나하나 만지고 살피며 자연 관찰을 시작했다.

결국 버스를 포기하고 택시를 잡았다. 그날따라 길은 막히고 신호는 가는 곳마다 걸리고… 등원은 물론이고 중요한 아침 회의에도 늦고 말았다.



"죠죠야, 우리 약속 하나 하자.

어린이집은 옮기지 않을 거야. 대신에, 아침에는 여기저기 들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야 해. 버스정류장까지는 15분 안에 가기! 약속!"

"오리랑 낫짱(なっちゃん:일본의 과일음료)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매일 늦으면 회사에 다닐 수가 없어. 엄마가 일을 못하면 콤비도 그만둬야지. "


언제나 그렇듯 약속은 은근한 협박으로 변해간다.


"그건 안돼! 알았어... 그러면, 집에 올 때는 괜찮지?"

"흠… 그래. 저녁에는 맘껏 걸어도 돼."

"그러면, 아침에 게시판은 되지?"

"봐도 되지만, 딱 5분만."

"그러면, 토요일에 공원 가고, 책방에서 키라피치(キラピチ:출판사 GAKKEN에서 발행되는 아동용 잡지) 사자."

"그래. 평일에 잘하면, 주말에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굳은 약속을 받아내려고 이야기를 시작한 건데, 어느새 주도권은 집요하게 조건을 추가하는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 정도 협상 기술과 화술이라면, 더 이상 함께 걷고 말하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하산시켜도 되지 않을까?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그날부터 우리의 협상은 제법 철저하고, 성실하게 이행되었다.




새로운 집과 동네에 조금씩 적응해 갈 무렵, 아이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나 영어학원 갈래."


아이의 영어 교육은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고 있던 터였다. 엄마의 욕심으로 서둘렀다가, 또다시 언어지연과 이중언어의 늪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


"갑자기 왜?"

"나는 외국인이라서 영어를 잘해야 돼."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우리는 한국어, 일본어, 두 개나 하잖아. 영어는 그 두 개를 잘하고 나서 시작해도 돼."

"응, 나 이제 한국말도 일본말도 잘해.

나 떡집 사장님이 될 거야. 거기 외국인 손님도 많이 올 거야. 그래서 영어 잘해야 해."


아무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엉겁결에 아이와 앉아 집 근처 영어학원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은 평일 수업뿐이거나, 주말반은 자리가 없어서 한없이 기다리라는 식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 머릿속은 괜히 워킹맘을 선택해서 아이의 기회까지 막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찬다.

마침 토요일 수업이 있고, 수업 분위기도 밝아 보이는 곳을 하나 찾았지만, 집에서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죠죠야, 이 지도 봐봐. 가까운 곳은 몇 개 없고 자리도 없대. 여기 재밌어 보이는 곳도 걸어서 20분이나 걸려."

"20분? 가깝네!

여기 사진 봐! 핼러윈 파티도 한대! 진짜 재밌겠다!"


몇 년을 아침저녁으로 걷더니, '가깝다'의 기준이 고장 나도 아주 단단히 고장 난 모양이다.


"20분이면 꽤 멀지. 엄마는 여기 길도 잘 몰라."

"엄마, 여기 지도 봐. 버스에서 본 데야.

나 길 다 아니까, 엄만 날 따라와."


길에서 지도*를 발견할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살펴봤던 것의 효과일까. 이제는 지도도 길도 척척이다.

그만큼 길을 몰라서 못 간다는 어설픈 핑계는 통하지도 않지만.

내 손을 꼭 잡고 걷던 아이는, 이제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앞장서 나아갈 만큼 많이 자랐다.




그래, 해방일 리가 없지.

끝은 끝이 아니다. 걸어서 등하원이 끝나면 끝나는 대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거다.



*도쿄의 길가에는 현재의 위치를 알리는 위치안내도, 방재 안내도, 자전거 주차 안내 지도… 지도가 그려진 표지판이 유난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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