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걷는다
휴, 다행이다. 구물 꾸물 내리던 눈도 그쳤고, 공기도 선선한 것이 걷기에 딱이다. 오늘은 아이가 동네 상점회 게시판에서 보고 찜해 뒀던 모찌츠키 다이카이(もちつき大会:찹쌀떡을 찧는 전통 행사)에 가 봐야겠다. 그게 끝나면 화과자만큼이나 좋아하는 명란 바게트빵을 사러 옆동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린이 도서관에 들러서 책을 반납해야지.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면, 나는 자연스레 오늘 걸을 길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엄마, 오늘은 어제보다 안 춥네!"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아이도 당연한 듯 창문 틈으로 코를 내밀어 기온을 체크하고는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걷는다. 동네 골목골목을. 늘 하던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엄마, 있잖아. 어제 학교에서 켄타 군이 '한국사람은 아뇨하세요라고 인사한다'라고 놀리는 거야. 내가 너무 짜증 나서 '너 발음 틀렸어. 안녕하세요도 제대로 못하면서!'라고 화냈는데, 걔가 내 말 무시하고 계속 놀렸어. 그래서 '나를 좋아해서 놀리는 거지?'라고 했더니, 화내면서 아니라고 하더라…그래서… 내가…
아, 맞다. 근데, 학동(学童:방과 후 돌봄 교실)에 새로 온 선생님이 한국 가수를 좋아한대. 그래서 내가 데이식스를 아냐고 했더니 선생님도 팬이라고 했어. 신기하지?… 그래가지고…"
'귀에서 피가 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요즘. 한없이 걷는 거야 운동이라도 되지, 발 한 걸음마다 이어지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보고를 듣다 보면, 다리보다도 귀가 먼저 아파온다.
하지만 뭐, 귀에서 피가 나면 어떻고, 만 보 이만 보 걸음수보다 말수가 더 많으면 어떤가. 제발 아이가 말할 수 있게만 해 달라고 밤새 빌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 소란스러움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계획대로만 움직여도 늘 바쁜 워킹맘의 일상이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와 걷기를 택한다. 도쿄의 골목이 키워준 우리 아이가, 이 길 위에서 또 한 뼘 한 뼘 자라나기를 바라며.
그리고,
아이에게 늘 미안해하기만 하는 기운 빠진 직장맘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세상을 걸어 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워킹맘이고 싶어서.
<맺음말>
첫 브런치 연재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댓글과 메일로 응원해 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도중에 브런치를 떠나셨지만 '이 글을 읽으면 내가 자라는 느낌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먼0님께도 이렇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치 못했던 시기에 받은 소중한 응원이라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이 이야기는 3년 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에세이집 <일본에서 일하면 어때?> 이후로, 본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혼자 품고 있던 주제였습니다. 그러다, 동시 연재 중인 '안와내용물제거술'에서 밝혔듯이 급작스레 종양을 발견하여 눈 한쪽을 완전히 들어내게 되었고, 다사다난한 회복기간 중에 문득 '이제 내 인생에 나중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럴싸한 성공기도 정답도 아니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맞나?', '내 상황이 왜 이렇게 꼬였지?'라고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위로가 되는 글이 되기를 바라며—
저는 또 서둘러 나갑니다. 죠죠와 함께 걸으러.
-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