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가진 힘

내 목소리 듣기

by 조이아


내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다. 프랑스어를 공부할 때나 (암기 스터디를 했다. ㅠㅠ두 달 되었다, 와해된 지. 이 년의 세월이 무색하다.) 글을 쓰고 나서 읽으면서 녹음을 해보기도 했다. 고쳐쓰기 단계에서는 눈으로 글을 보는 것보다 목소리를 더해 읽으면 어색한 부분이 확 티가 나서 글이 더 매끄러워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문장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더라도, 어떤 글은 내 목소리로 읽으면서 울컥할 때가 있다. 목소리엔 분명히 뭔가가 있다.


원격수업 준비를 하면서 듣는 내 목소리는, 처음에는 영상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듣기 힘들었다. 지난번에도 썼듯이 국어 수업이기 때문에 발음에도 유의한다. '사뿐히 즈려밟고'에서는 '밥:꼬'라고 발음하는 게 맞고 '효과가 있다'에서는 '효과'라고 힘을 좀 빼고 발음한다.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는 말들도 거슬린다. 나는 '그치?', '다음' 이런 말을 자주 한다는 걸 알았다. 다음 활동이나 다음 문제로 넘어갈 때면 자꾸 '다음'이 들어간다. '그렇지?'의 경우에는 오프라인 수업 때 많이 쓰는데, 왜 자꾸 학생들에게 확인을 받고자 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상시에도 상대방으로부터 내 말이나 내 마음에 동의해달라고 '그렇지?"를 꽤 쓴다.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라는 책에는 <내 목소리가 이렇다고?>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지난번 독서동아리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김하나 작가의 책을 소개하고, 저 꼭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활동 과제로 내준 것은, 자기가 낭독하는 것을 녹음해서 듣고 소감문 작성하기였다. (안 할까 봐 낭독할 글도 프린트해서 주었다. 고심해서 고른 글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처음 몇 단락. 낭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거든, 환경에 대해서라도 생각하라고.)


아이들의 소감은 이러했다.(중학교 2, 3학년 여학생)


처음에는 목소리 톤이 일정하지 않고 왔다 갔다 했다. 중간쯤 정도 읽을 때는 목소리가 안정되면서 발음이 새는 것 같고 내가 무슨 말은 하는지 모를 정도로 버벅거렸다. 한 번쯤 이렇게 녹음을 해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니 무언가 새로웠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많이 들어보았어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직접 듣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색다른 경험을 해 본 느낌이다. 그래도 나중에 또 해보지는 않을 것 같다.

낭독을 녹음한 후의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는데 녹음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거라서 어색하기도 하고 버벅거리기도 하였다.

내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니 기분이 묘했다. 다음부터는 또박또박 말해야겠다.

내 목소리를 녹음한 후 들어보았을 때에는 내 목소리가 이랬나 싶기도 하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상대방에게 이렇게 들렸었다니 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목소리가 새롭게 느껴졌다.

목소리가 떨리고 중간에 버벅거리는 부분도 있어서 같은 부분만 말하는 것을 듣다 보니까 지루했지만 목소리를 다시 들어보는 것이 이 정도로 긴 것은 처음이라서 놀라웠다.



비록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이라고는 하지만, 국어시간에 우리는 내 목소리를 입고 낭독을 할 때가 많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난 국어시간, 활동지를 세 장이나 들고 수업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야유를 보냈지만 '통일 시대를 대비한 국어의 길' 단원과 관련하여 백석의 시를 감상하자고 했다. (통일과 관계없이 그냥 문학 감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북한 축구 용어보다는 나는 문학이 좋으니.) 백석 시인의 생애와 그의 사랑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자야 김영한과 길상사에 얽힌 동영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더니, 통영에서의 좌절 - 그러니까, 자신의 연애 상담을 해주던 친구가 시인과 혼사 이야기까지 오가던 상대와 덜컥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에는 아이들이 꽤 흥분했다. 그러나 그러한 흥분도 잠시, 본격적으로 시를 감상할 때가 되자 아이들은 조용히 지쳐갔다.


그래도 몇 명의 빛나는 얼굴을 향해 나는 신나게 이야기했다. 시는, 시인들의 낭독을 꼭 들어봐야 한다고 말이다. 십여 년 전에 종로에서 시 감상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무려 장석주 시인님의 수업이었다. 시인님의 평론집 <풍경의 탄생>이라는 책을 갖고 했던 과정이었는데, 그때 시인께서 낭독해주시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전까지 나에게 그 시는, 촌스러운 이름과 이상한 동물이 등장할 뿐인 시였으나, 그때의 낭독을 기점으로 진정한 사랑의 시가 되었다. 책 속에 누워있던 시가 비로소 생명을 갖고 내 눈 앞으로 걸어 나와 나와 마주 선 기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그런 감동을 전해주고 싶었다.

최근 '오디오 클립'에서 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 랜선 라이브 낭독회가 있었다. 그때 함께 참여한 황인찬 시인은, 그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시 낭송의 귀재 같아서, 말하는 목소리와 시 낭송 목소리가 많이 다르다.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노래를 하듯 펼쳐지는 그 낭독을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마침 어떤 분이 유튜브에 딱 그 부분을 올려주셨더랬다. 황인찬 시인이 낭독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아이들은 어떻게 들었을까. 그들은 계속 침착할 뿐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은 백석 시인, 백기행이 북한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상상하여 쓴 소설이다. 오디오 클립에서 작가가 직접 낭독하여 연재한 적이 있다. 전율하며 들었더랬다.)


내가 좋아하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제목이 무슨 뜻일까를 묻고 직접 시를 읽어 내려갔다. 시 읽기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를 물으며 가볍게 시작했지만, 그 긴 시를 읽어 내려갈수록 시의 의미가, 또는 생의 의미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시 속으로 들어가 읽는 느낌이었다. 내 목소리에 내가 취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시 낭독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로 마치고는 얼른 나를 수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끔씩 나는 수업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힐 때가 있다. 예컨대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거. 그 소설을 내가 몇 차례나 읽었을 터인데 그날은 왠지 울컥하던 것이었다. 또는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을 감상하면서, 혹은 손택수의 <흰둥이 생각>도 그렇다. 다른 누가 읽을 때보다 꼭 내가 직접 소리 내어 읽다가 그런다. 이게 목소리가 가진 힘일까? 아님 시에서 그러하듯이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일지.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닌 척 그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 목소리에서 묻어났을지도 모를 진정성 같은 것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시를 낭송하고 민망했던 나는 얼른 그다음 시는 다른 학생에게 읽도록 시키고, 동네책방 버전의 <일곱 해의 마지막> 책 표지가 얼마나 보드라운지, 한 번 만져보라고 권하거나(코로나 시대에 잘못했다), 여기 꽂혀 있던 엽서는 이렇게 두 종류인데 누가 갖고 싶으냐 따위로 마무리했다. 그래 놓고 이다음 시간에야 지난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앉아있던 스물 두 명 중 누구라도 백석의 시를 가슴에 새기기를 바라면서.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글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눈으로는 보지 못하던 어떤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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