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글쓰기반 아이들에게 받은 기운으로 쓴다.
중학교 자유학기제에서 '쉬운 글쓰기'반을 맡았다. 열네 명의 학생들과 8주 동안 두 시간 블록타임으로 활동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원격수업으로 죽 진행하다가 1단계로 바뀐 후, 등교 수업에 따라 딱 3주 얼굴을 마주하고 수업할 수 있었다. 마지막 주 두 시간의 수업을 잊고 싶지 않아 기록으로 남긴다.
작년에도 글쓰기 반을 맡았는데, 그때 이름은 '나를 살리는 글쓰기'였다. 예전에도 썼지만 당시의 1학년, 그러니까 지금의 중2 아이들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장난꾸러기가 많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나를 '살리는' 글쓰기 수업을 하기란 매우 난감했다. 예전에 3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할 때는 진지한 분위기에서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졌던 것 같은데 내가 아이들 파악을 잘 못했다는 생각에, 올해에는 수업 제목부터 바꾸었다. '쉬운 글쓰기'로. 작년에 했던 자신에 대한 글쓰기 활동에, 권귀헌의 <초등 글쓰기 비밀 수업>을 참고하여 글쓰기를 놀이로 접근하는 활동을 병행했다. 원격수업으로는 아이들이 활동한 것을 과제 게시판에 올리면 피드백하는 것으로 진행했는데, 몇 명은 과제를 올리지 않아 난감했다. 그러다가 등교 수업 때 만난 이 아이들은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제안하는 활동에 호감을 갖고 해주는 모습이 정말 예뻤다.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연필 한 자루, 꿈 노트 등도 감사히 받을 줄 알았다.
민상기의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글쓰기 소재 365>라는 책에는 재미있는 글쓰기 목록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신이 내게 준 선물이 무얼까 아이들과 생각해봤다. 손, 발, 눈, 코, 입 이런 것을 떠올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써보라고 했더니 '게임할 수 있는 튼튼한 엄지 손가락', '탁구칠 수 있는 손' 이런 것을 생각해냈다. 나는 예를 들어 '남들보다 눈치가 있어서 상황이나 분위기를 잘 파악한다'와 같은 문장을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한 남학생 매는 이렇게 적었다. '눈치가 빨라서 상황 파악이 되고, 그래서 선생님이 혼낼 때 안 들키고 조심할 수 있다.' 훌륭하다. 늘 진지하고 감성적인 남학생 다람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물건에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라고 적었다.
다섯 가지씩 목록을 작성하게 하고, 그중 하나를 골라 나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에 대해 적어보자고 했다. 나 또한 즉석에서 슥슥 글을 써 내려갔는데 내가 고른 능력은'남들에게 다정하게 말 건네는 능력'이다. (남편이 보면 웃겠다. 여기까지만 읽어요, 우리 집사람!) 마구 써 내려간 내용은 이렇다. '남들에게 다정한 말을 잘 건네는 편이다. 칭찬은 아니더라도 다정다감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감이 있다고 보는데, 생각해 보면 중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반응이 아닐까 싶다.' (너무 자뻑인가요. 그러면서 '소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에게도 읽어주었다.)
<열세 살의 여름>란 책을 소개했다. 이윤희 작가의 그래픽노블이다. 6학년 혜원이의 여름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나의 6학년은 아주 먼 옛날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내 모습과 마음이 환기되었다. 그때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는 고작 일 년 전일 테지만 열세 살 자신의 고민을 떠올려보게 했다. 열네 살 현재의 고민도 써보게 했다. 열일곱 살, 스무 살 때의 고민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보자고 했다. 그리고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자신의 마흔 살을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내가 이루고 싶던, 원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자고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침에 눈 뜨면 보이는 풍경은 무엇일까. 내가 살고 있을 집은 어떤 상태일까, 나는 그때에도 대전에 살까. 런던이나 뉴욕이 될 수도 있다며 이런저런 희망을 잔뜩 꿈꾸게 했다. 그리고는 마흔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떠올리면 어떨까 생각해보자고 했다.
원하는 모습대로 살고 있는 마흔 살의 내가 떠올리는 열네 살의 나-.
"예를 들면, 얼굴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라고는 피부 하나였는데 요즘 들어 자꾸 여드름이 생겨서 이제 한 군데도 마음에 안 드는 나. 머리는 곱슬이고, 남들보다 키가 큰 편도 아닌 나. 친구들이랑도 잘 지내고 싶지만 가끔 내 생각과 다르게 튀어나오는 말투에 나도 놀랄 때가 많은 나. 우리 집이 부자도 아니고, 내 머리가 엄청 똑똑하지도 않지. 매일 아침 겨우 눈 떠서 꾸역꾸역 등교하고, 마스크를 쓴 채로 생활하고, 주어지는 급식을 먹고, 이 작은 교실에서 복닥복닥 지내는 나를 말이야."
먼 미래에 이때의 고민을 떠올린다면, 그 고민의 크기는 어떻게 여겨질까. 마흔 살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어떤 충고를 할까. 그 상상을 적어보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치유하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건, 글쓰기의 치유력입니다. 나에 대해 이런저런 접근을 해보면서, 내 고민이나 걱정을 덜어내고,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 중요해요. 근데 그게 꼭 상담을 받거나 내 인생을 바꾸지 않더라도, 글을 쓰면서 후련한 마음을 느끼거나 걱정거리를 좀 더 담담하게 내려다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 일곱 쪽의 일기를 쓴 적도 있어요. 욕을 써도 좋아요, 무엇이든 배출할 수 있다면 그게 글쓰기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가 종종 찾아올 텐데, 그럴 때 글쓰기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선생님이 너희에게 바라는 점입니다."
준비한 수업 내용은 아니었는데 아주 흥분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거다. 아이들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하는 내내 내 얘기를 들어주는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스크 때문에 눈밖에 안 보이지만) 나는 그들이 아주 힘껏 내 이야기를 빨아들이는 기운을 느꼈다.
두 장 짜리 편지지와 색감이 예쁜 편지봉투 세트를 나누어 주었다. 편지지를 접어 넣으면, 편지지 겉면에 쓰여 있는 '사랑해요', '감사해요'라든가 '좋은 일만 가득' 같은 멋진 글씨가 하트로 구멍 난 편지봉투에 보이는 형태였다. 열네 명의 아이들은 저마다 진지한 얼굴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혼자 감동했다. 통합지원실 아이와 또 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슨 말을 쓰는지 정말 열심히 쓰는 거다. 앞 시간에 '말의 힘'에 대해서도 나누었으니, 나를 키우는 말을 써 내려가겠지? 너의 고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넌 뭐든지 이루어낼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을 해주면 좋겠다. 그 좋은 말을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해줄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한 거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편지는 내가 읽지 않을 거예요. 오늘 집으로 가져가서 소중히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그들의 성의 있는 모습에 감탄하다가 수업에 대한 소감을 쓰는 시간이 부족해졌지만, 다 같이 글을 쓰던 순간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
어쩌면 나만의 특별한 능력이란, 자기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것 아닐까. 글씨를 잘쓰는 것도, 농구를 잘하는 것도 특별하지만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자기를 응시하는 일이 더 중할지 모른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을 알아가는 일. 자기를 알아가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질 테니까. 나는 아직도 쉰 살의 나를 알지 못하고, 그 후의 삶 또한 모른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면서 내면을 가꾸면서 살아갈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안에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가능성이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공책을 걷어와서 아이들의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열네 살과 열일곱, 스무 살에는 각각 친구 관계, 성적, 좀 더 있으면 취업 걱정을 할 것 같다는 글들이 있었다. 부모님의 건강을 벌써부터 헤아리는 친구도 있었다. 미래의 내가 나에게 어떤 응원의 메시지를 적었을지가 정말 궁금하지만,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다만 공책의 맨 끝에 쓰인 그들의 소감은 이러했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들어왔지만, 생각보다 글쓰기가 재미있었다. '
'글을 또 쓰고 싶다.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흥미 있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한 줄은 이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도 모르던 나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신기했다.'
뿌듯하다. 그리고 곧 시작될 2기 '쉬운 글쓰기반'도 기대가 된다. 아이들을 위해 공책과 클리어파일 하나하나에 라벨지로 '쉬운 글쓰기'를 붙이고, 나누어줄 연필과 꿈노트를 다시 셈해 본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로부터 내가 더 기운을 얻는다. 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나도 글을 쓸 수 있다.
*제목 그림은 <100 인생 그림책>의 한 장면을 따라 그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