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전부인 것과 동시에 전부를 사랑하는 것
어제부터 한 곡만 듣고 있다. F코드의 연주를 들려주겠다던 피아노 선생님의 재즈식 연주 때문이다. 전문가적인 평상시 모습과 달리 콘서트 직관을 방불케 하는 예술가적인 면모가 있었고 좁은 연습실 안엔 코드고 뭐고 감탄하기 바빴던 내가 있었다. Love is all, 그러니까 사랑은 전부라고 주장하는 밴드 검정치마의 조금 빠른 곡. Love is all all is love love is all 나는 종일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사랑이 전부라는 이 가사를 작게 흥얼거리고 마스크 안으론 무음의 노래방을 차린다.
그래. 사랑은 너무 전부지. 그건 마지막 연애가 희미한 나 같은 이도 아는 공식이다. 결혼이란 너무 잘 알면 이것저것 따지게 되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 하는 게 가장 좋다는 어른들의 조언처럼, 어쩌면 사랑의 약점은 사랑이 전부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되물을 이들이 생각난다. 그것은 나처럼 쉽게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약점이 된다. 나는 사랑이 전부라는 것도 모른 채 사랑이 전부였었다. 그것은 지금의 나로부터 거슬러 내려가 아주 오래 전의 나로 인해 시작된다.
사랑에 관해 거의 최초로 내 세계가 무너진 일. 고3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곱상한 외모의 이 모 씨에게 반해 시작한 연애는 주말 데이트는 물론 독서실에서도 공부 대신 매일 일기나 연애편지를 쓰곤 했다. 그러다 대학 가서 만나자는 당시엔 납득 안되던 이유로 수능 백일 전 차였던가. 남들이 공부할 때 나는 실연의 아픔을 겪으며 구슬픈 감성 힙합에 취해 눈물만 흘렸다. 이 모 씨가 그리워 공부가 안 됐다. 당연히 수능도 망쳤다.
이십 대 들어선 더했다. 라떼 좋아한다는 김 모 씨에게 잘 보이려고 라떼만 마시다 유당불내증 때문에 고생했던 것은 물론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친구들 만나는 것 싫어하는 그를 위해 친구 모임에도 안 나가 친구들의 원성을 샀다. 춘천 사는 최 모 씨 한 번 더 보려고 있지도 않은 춘천 지인도 만들어봤고, 제주도에서 만난 강 모 씨 때문에 제주도 이주 계획까지 했었다. 이 모든 이별 후엔 당연히 머리카락도 싹둑 잘라보고 청승이 목적인 혼여행도 가봤으며, 술 마시고 전화 걸어 진상 짓은 물론 방 안에 틀어박혀 수도꼭지처럼 울어도 봤다. 사랑이 끝난 내 세계엔 늘 폐허였다. 세상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비겁한 말. 뭐가 아름다워? 내 사랑의 끝은 모두 이렇게 엉망이기만 한데.
그러니까, 사랑이 내게 너무 전부였던 나머지 이별과 동시에 내 세계는 공허 그 자체가 되었다. 공허가 넘어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내게는 사랑의 ‘대상’만이 전부였다. 그에게 몰두한 만큼 실연의 대가는 커다랬다. 적당히 몰두하는 법을 몰랐다. 나는 누구를 좋아하면 너무 좋아해 버리는구나, 나 자신은 없는 거구나. 사랑이 전부라는 사실을 아는 건 내겐 약점이 되었다.
연애를 통해 경험한 사랑으로 내 세계가 여러 번 무너지는 걸 겪고 나니 사랑을 원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 경험이 세상의 수많은 사랑의 형태를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사랑을 갈망하기를 멈췄다. 사랑에 관해 보고 겪고 읽고 쓰며 사랑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그렇게 모든 대상들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가 흐릿해져 갈 무렵부터 나는 나에게 몰두해 보기를 노력했다. 내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고 사랑할 순 없을까? 대상에게 또 너무 깊게 몰두하다 사랑이 끝나면, 그럼에도 너무 엉망이지 않을 수 있을까. 대상(타인)의 사랑을 증폭시키기 위한 질문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나 자신이 내 사랑의 대상이고 싶었다. 사랑을 향한 관심의 질문은 내면에서 계속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랑 후에 다시 내게로 돌아올 나를 향한 질문들이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75
그래서 찾은 정답은 놀랍게도 전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Love is all all is love. 사랑은 전부인 것과 동시에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 나를, 삶을, 대상을,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대상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능한 일인가.
이 문장을 읽고 얼마 전, 택시 기사님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환갑을 맞이해 큰 아들 부부가 사는 베트남에 다녀왔는데 며느리가 준비한 깜짝 생일파티가 그렇게 좋으셨단다. 일부러 나이와 같은 60층 객실을 미리 예약하곤, 통창에 붙인 숫자 풍선까지 감수성 풍부해지는 아버지들 감동 버튼을 저격한, 장녀인 나도 언젠가 해본 적 있는 이벤트였다. 아들만 둘인 집에 똑똑하고 싹싹한 복덩이 덕분에 호강한다며. 어쩌다 보니 그 집 큰 아들의 삼수와 전 여자 친구와의 양다리썰까지 알게 되었지만, 며느리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그 애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는 애틋한 어투에 사랑이 실려있어 나도 모르게 뭉클했었다.
토요일 오후 잠실역, 막히는 시간이었다. 빨간불엔 계속 당첨되고, 차들은 매너 없이 끼어들기 일쑤에 시원하게 뚫리는 법 없는 도로 상황임에도 기사님께 선내 내 싱글벙글 웃으셨다. 당시엔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기억에 맴도는 게 이상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것은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였다. 참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의 사랑의 언어. 자식보다 어린 낯선 손님에게 망설임 없이 순수함을 비추며 사랑을 자랑하는 일이 ‘참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면 무엇일까?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커다란 사랑은 어이없이 일상의 사소한 장면에서 보인다.
그러고 나니 전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출퇴근 길에도, 여행지에도, 미술관에도, 횡단보도에도, 스치듯 지나간 사람에게도, 먼 나라에도. 그들이 쟁취한 사랑의 시선은 모든 것, 모든 곳, 생애 모든 순간에 있음이 느껴졌다. 전부를 사랑하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대상’만이 사랑의 전부일 때의 사랑의 모양은 풍선 같았다. 손에 지니면 퍽 아름답기도, 약간은 과시적이기도 하지만 팡-하고 터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화려한 풍선, 착오된 지나온 사랑들. 사랑이 전부라는 사실은 더 이상 내게 약점이 아니다. 풍선을 터뜨리고 전부를 사랑해 보기를 연습한다. 그리고 사랑을 갈망할 거다. 전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꺼이 모든 사랑(all)을 베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