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쉽게 느끼는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런 걸까?
싱가폴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보내는 첫여름이었다.
친구들이랑 가끔 등산을 다녔는데 그날은 체감온도가 40도에 웃도는 뙤약볕 날씨였다. 더위를 피하려고 아침 7시부터 부지런히 올라갔는데도 한참 가다 보니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공복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더위를 참지 못한 나는 중간에 웃옷을 벗어던지고 스포츠 브라탑 차림으로 산행을 이어갔다.
이른 산행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정상에 다다를 때쯤 이미 하산 중인 중장년층의 등산객들과 마주쳤다. 내 차림새에 따가운 눈초리를 쏟아붓더니 나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어머... 아가씨 많이 덥나 보다..."
"네, 많이 덥네요. 하하하..."
그들은 뒷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않았지만 따가운 눈빛과 언짢아하는 표정에서 내 차림새를 불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친구들에게 얼굴을 돌려서 '야, 이거 뭐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은 이 상황이 재밌었는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면서 '일단 올라가자'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더 올라가다가 주변에 다시 우리만 남게 되자 내가 입을 뗐다.
"야, 아니 이 삼복더위에 운동하다가 브라탑 입고 다니는 게 이렇게 눈초리 받을 일이야? 내가 발가 벗고 다니냐 지금!?"
"아우 야, 저기는 아줌매 아자씨들이잖아. 한국 사람들 보수적인 거 뭐 알면서 그러냐. 네가 한국 온 지 얼마 안돼서 적응이 아직 안 됐네."
"아니 여기도 헬스장, 요가원만 가바. 다들 이러고 돌아다니는데! 헬스클럽 가서는 벗고 다녀도 괜찮고 산에서는 브라탑 입으면 안 되고 그런 거야? 어디가 더 덥겠냐 지금? 어이가 없네 진짜."
이 당혹감은 어디다가 풀어야하나?
모든 사회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추구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가 존재한다.
어른들은 그들이 따르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맞춰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 과정이 사회화인데, 사회화란 아이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우리의 사회 문화적 가치를 주입하고 그 가치를 지켰을 때 보상한다. 반대로 어른들은 아이들이 사회 문화적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처벌한다.
이렇게 사회화에 따른 상벌을 받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가지 가치를 평가할 때 보통 그 반대 가치는 비난하기 때문이다. 사회화를 겪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소속감을 갖기 위해, 안정감을 찾기 위해 딱 한 가지 옵션밖에 없다. 바로 자기가 태어난 사회 문화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맞춰나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수치심이 자라나는 지점이다.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어린아이는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좋은 관념도 나쁜 관념도 없다. 한 아이가 노출은 저속하고 정숙함은 고귀하다도 여기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태어났다고 치자. 이 아이가 발가벗은 채로 손님들이 많은 자기네 집 거실에 돌아다닌다면? 어른들은 바로 이 아이의 행동을 자제시킬 것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야단을 치거나, 아이를 방으로 억지로 들여보내 훈육을 할 것이다.
이런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거부당한 아이는 당혹감과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아이는 미래에 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이런 반복된 경험을 통해 '정숙함'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다음부터 선택한 기준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당신은 어떤 아이가 되라고 훈육받았는가?
나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한국의 집단무의식을 물려받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사회화를 겪으며 자란 한 여자사람으로서 스무 살까지는 틀에 갇힌 사고를 해왔었다. 나도 한 때 누군가에게 눈초리 받을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을 정도로 남의 시선에 연연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이십 대부터 해외생활에 더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무척 편안해하는 나를 느끼면서 고정적인 사고의 틀을 깨는 경험을 쌓아왔다. 그렇게 어느샌가부터는 '이게 왜 안될 일이야?'하고 갇혀 지냈던 나를 사회적 고정관념에서 꺼내고 또 꺼내왔다.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행동을 감시하고 비판하게 두는 것보다는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 훨씬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좋은 아이'가 되려고 엄청 애를 쓰게 된다. 수치심은 아이가 나쁜 아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을 할 때마다 울리는 알람 역할을 함으로써 사랑받을 수 있도록 알려주는 장치인 셈이다.
만약 당신이 '나쁜 행동(doing something bad)'과 '나쁜 사람(Being bad)'을 구별하지 못하고 싸잡아 단정 짓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문제가 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커서 만성적으로 수치심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명확하게 구별하자. 수치심(shame)은 내가 나쁜 사람(Being bad)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고 죄책감(guilt)은 내가 나쁜 행동(doing something bad)을 저질렀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만약 당신이 사회적으로 나쁜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행위를 했을 때 부모가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지적했다면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 여겨서 수치심을 더 느끼게 됐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엄마 몰래 과자를 훔쳐 먹은 아이를 나쁜 아이라고 혼을 낸다면 아이는 나쁜 행동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수가 없게 된다. 과자를 훔쳐 먹은 아이는 그 행위에 대한 죄책감 대신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또 다른 예로 전형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나중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다면? 이 아이는 성경에 따라 이성애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 평생 깊은 수치심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우리 모두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가 사회에 적합한지 부적절한지를 구분하는 관점을 발달시키게 된다. 나에 대한 어떤 부분이 내가 속한 사회 집단의 가치와 상충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특히 내가 그 부분 때문에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나는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믿게 된다. 스스로 부적절하고, 열등하고, 충분치 않다고 여긴다. 수치심은 낮은 자존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낄 때 방어적으로 변한다.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게 될 수도 있다. 남을 비난을 함으로써 자신의 불안함과 약점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고 싶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중받을 가치가 없고, 무시받을 수밖에 없고, 무가치하고,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끼는 걸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자기는 옳고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어 버린다. 가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경멸을 느끼지 못하게 쓸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데 오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수치심이 심해지는 경우 일부는 신체적인 질병으로까지 나타날 수 있다. 심신의학(body-mind medicine)에 따르면 수치심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질병으로는 만성 피로 증후군, 여드름, 중독, 섭식 장애, 발기 부전, 신장 부전, 암, 언어 장애, 만성 통증, 우울증, 불안, 양극성 장애, 자가면역 질환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만약 부끄러워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적으로 어떤 기준에 맞춰 살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만성적인 수치심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기도 모르게 맞춰 살고 있는 사회적 기준을 인식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적인 기준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왜 그 기준에 맞춰 살아야만 하는가?
앞으로도 어떤 기준에 맞춰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기존의 기준을 바꾸고 싶다면 그 기준 뒤에 있는 신념들까지 바꿔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그 기준이 사랑하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싸잡아서 판단하고 비난하게 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