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은 새로운 삶의 시작
이 참에 친구 하나를 소환하겠다. 아니 고발하겠다.
친구 김여사는 아이가 여섯이다.
왕자가 셋, 공주가 셋이다.
이 글의 필자인 연강은 딸만 둘!
둘째 낳다가 저 세상 갈 뻔했다.
남편이 분만실에서 내 뺨을 갈기지 않았으면
그대로 난 황천길이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주섬주섬 말을 하자면, 진통으로 실신한 나를 깨우기 위해 의사가 시킨 것이란다.
우리 세대에서는 고작 한두 명이 대세였다. 자식 여섯은 까무러칠 숫자다.
김여사가 위로 셋을 낳은 지 오랜 후 또 아이를 가졌다고 선포할 때, 나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쌍둥이였다. 세 쌍둥이.
당연히 노산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김여사의 신체 나이는 거뜬해보였다.
세 쌍둥이를 한 방에 해결(?)하고, 고된 눈빛 하나 없이 호기롭게 웃는 김여사는 아이를 낳고나서 오히려 회춘한 것 같았다.
그 가녀린 팔로 세 쌍둥이를 팔에 안아
젖을 먹이는 모습이라니.
팅팅 부은 젖가슴을 당당하게 내놓으며, 이제 노쇠해져가는 내 몸뚱아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의 자괴감이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 조선 다산(多産)의 여인이여!" 라고 말한 후, 기겁하고 뒤로 자빠질뻔 했다.
당시 둘째를 초등학교에 보내놓고 자유부인이라도 된 마냥 손을 탈탈 털었던 나에 비해
그녀는 이제부터 진짜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보다 더 치열한 독박 육아전쟁이 시작된 건데 말이다.
그럼에도 내 안에 왜그런지 부러움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건 무슨 심보일까?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서워졌다고 애써 위로했다.
헤바메(독일에서 아이를 낳은 후 아기 관리나 산후관리를 해주는 도우미. 직업교육을 받은 여성이다)의 도움을 받은 그녀는
그 와중에 또 일을 저질렀다. 출산과 산후조리 와중에 박사 논문을 쓰고 기어이 통과까지 했다.
논문 하나 쓴다는 게 얼마나 뼈를 깎는 노동인지
나도 알고 있다.
법학을 전공하는 이십대 내 딸도 논문 쓸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쉰다.
"엄마, 논문 하나 쓰면
흰 머리가 몇 개 생기는 것 같아요!"
내 말이!
김여사, 너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위대한 여자다.
깊게 패인 팔자주름은 어김없이 나이를 말해주지만, 눈빛은 갓 시집 온 새댁처럼 초롱했다. 게다가 발그레한 뺨은 젊음의 그것과 닮았다.
그랬던 게 벌써 십년 전이다.
이후 직장에 복귀한 김여사는 차분하게 일만 했다.
나도 매년 김여사네 아이들이 생일을 맞을 때마다 방문하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는 아이들이 신기했다.
세월이 거센 파도처럼 빨리 흘렀다.
그러던 지난 1월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폭탄을 입에 머금고 왔다.
이번에 아기가 아니라 다른 건이었다.
"연강, 나 이번에 독일 신학대학원에 합격했어. 나, 나중에 독일교회 목사가 될 거야."
"..."
여러분! 말줄임표에 내재된 내 표정을 읽었는가?
'어.이 없.음'
"언젠가부터 불쑥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진 거 있지?"
"김여사야!, 정말이야?"
"응. 내가 거짓말한 거 봤어? 진짜지."
"얘, 우리 오십대야! 이제 여생을 조금씩 떨궈내며 살아야 할 나이 아닌가? 이 나이에 무슨 공부? 그것도 그 어렵다는 신학 공부?"
"어머, 우리 아직 한창 나이야. 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진짜 어이 상실이다"
"이제 애들도 많이 자랐고, 나는 나로 살고 싶어."
"김여사! 지금까지도 넌 너였어!"
"하여튼 그래서 나 지금 히브리어랑 헬라어 공부 시작했어. 미리 공부하고 수업 들어가려고."
김여사를 어떻게 말려!
어느새 난 그녀의 향단이가 된 것마냥
곁에 묵묵히 서 있었다.
김여사의 향학열은 다시 불타 올랐다.
불교신자였던 그녀가 언제부터 신학에 대한 열정이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내가 다니는 교회를 몇 번 오긴 했었다. 다시 만났을 때 독일어 성경책을 1독을 끝냈다고 말했다. 진도가 빠르다 생각했다.
직장다니랴, 애들 키우랴 정신이 하나도 없을텐데 김여사의 하루 시간은 24시간이 아닌, 30시간 정도 되는 게 분명했다.
며칠 전 김여사의 세례식에 참여했다. 독일은 신학대학을 가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던 김여사는 급하게 자리를 마련해준 독일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그녀의 세례 증인자가 되었다.
독일인 여자 목사님이 집례 중에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프라우 김이 세례를 받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네, 하나님의 도움으로요.
(Ja. mit Gottes Hilfe)"
경건의 의식으로 촛불을 켜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친구를 위해 축사 비슷한 기도문을 작성해서 읊었다. 말하자면 우리식으로는 축가 같은 거다.
김여사를 위한 기도문을 한주 전부터 준비하는 동안 눈물이 계속 났다.
김여사의 지나온 삶의 질곡을 익히 알던 터였다. 첫 번째 독일남편과의 이혼과 두 번째 독일남편과도 함께 살지 못한 어쩌면 여자로선 불행한 삶이다. 하지만 김여사는 위기의 순간마다 특유의 미소로 이겨냈다. 재판정에 설 상황에서도 이방인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긍정의 끈을 붙잡았다.
"연강, 나 너랑 어딘가로 여행 가고 싶어."
김여사가 나에게 말했다. 눈빛 아래로 얼핏 스쳐가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우리도 결국 늙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언젠가 우리는, 이국땅에서 행복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 있다.
가장 빛나야 할 30대와 40대를 치열하게 이국땅에서 부딪히며 살았다.
어쩌면 이국땅이 아니더라도 중년의 시기를 맞이하는 모든 이들이 견뎌내어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지금 살고 있는 중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또다른 삶의 여정을 떠나는 김여사를 위해 행복한 쉼의 여행을 떠나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김여사가 부러웠다. 눈부셨다. 사랑스러웠다. 아름다웠다.
힘들 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삶을 회피하려 했던 나와 달리 김여사는 구구절절 맞서고 이겨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여정을 시작할지 아무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중년의 그대에게 진심어린 응원을 보낸다.
2화부터 더 재미난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계속 응원 부탁드려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