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순 Oct 10. 2018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집입니다

[출간전 연재 6]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집입니다>


페인트칠을 하고 이름을 새겨보아도 내 집은 되지 않았습니다. 2016년 여름, 이 문도 집과 함께 철거되었습니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공사를 하는 거예요! 나 원 참 밤낮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항의하는 여자가 안고 있던 하얗고 작은 강아지도 화가 난 듯 캉캉 짖어댔다고 한다.

“아주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최대한 조용히 해달라고 공사하시는 분들께 부탁드릴게요. 그래도 많이 시끄러운 공사는 대부분 마무리가…”

 “그러니까 다 망해가는 집에 뭐 하는 짓이냐고요!”


이 이야기를 할 때면 가족들은 언제나 박수를 치며 깔깔댄다. 작은 삼촌네가 80년대에 지어진 작은 맨션을 수리할 때 있었던 일이었다. 재개발이 된다는 소문이 10여 년째 무성만했으니 사실상 기약 없는 풍문인 셈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작은 삼촌은 전면적인 집수리를 결정했다.


낡아도 낡아도 그렇게 낡은 집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언제 적 평균 신장을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방문이 너무 낮아서, 그렇지 않아도 키가 2m에 가까운 사촌 동생들은 방을 드나들 때마다 허리를 숙여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반쯤 뜬 눈으로 화장실에 나설 때면 이마를 찧는 일도 다반사였다. 방과 베란다, 화장실의 높낮이가 다 달라서 화장실에 들어갈 땐 작은 다락방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보일러가 너무 오래돼 아무리 꽁꽁 싸매고 있어도 춥다고 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살 만한 집으로 만들려고 하니 자연스레 대공사가 됐다. 바닥을 뜯어서 보일러를 다시 깔고 거의 외벽을 뚫다시피 해 베란다 새시를 들어냈기 때문이다. 주변 주민들의 소음 스트레스가 심할 만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망해가는 집’이라니. 자기도 거기에 살고 있으면서....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삼촌네 집은 망해가는 집이 아니라 신혼부부가 살아도 될 만큼 화사하고 따뜻한 집이 됐다. 수리가 끝난 지 벌써 1년. 삼촌네 가족들은 편안한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직도 다 망해가는 집에 살고 있을 그분은… 글쎄?


요새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돈을 들여서라도 생활환경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여전히 집 꾸미기는 사치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것도 내 집이 아니라 전셋집이라면 더욱 그렇다.


열네 번째 집은 내가 마련한 첫 전세였다. 7평짜리 원룸이었는데, 천장이며 벽 곳곳에 물이 새 벽지가 얼룩덜룩했다. 게다가 보증금의 약 65퍼센트는 은행 빚. 하지만 나는 내 힘으로 전세를 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마치 그 집이 애초에 나를 위해 지어지고, 오직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애틋함마저 느껴졌다.


첫 전셋집을 장만했다는 기쁨에 인테리어 욕심도 샘솟았다. 적어도 개나리색 장판과 빚바랜 벽지만 바꾸면 정말 훌륭할 것 같았다. 집주인에게 교체를 요청했으나 멀쩡한 걸 왜 바꾸냐며 당연히 거절. 벽지와 장판 모두 교체할 경우 비용이 200만 원에 육박해 장판은 포기하기로 하고 벽지만 바꾸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도배하려고요.”

“몇 평이에요?”

“7평요. 전세에요.”

“아이고 남의 집에 뭐 하러 돈 들여.”


세상에 이토록 내 돈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니. 나는 자신의 수입을 포기하고 나의 돈을 걱정해 주는 아저씨의 이타심에 탄복하며 벽지를 골랐다. 내가 찾는 벽지는 콘크리트를 연상시키는 회색 벽지였다. 때는 2015년, 북유럽 인테리어의 유행이 극에 달했을 때였으니까.


“회색? 회색 벽지는 없어. 벽에 누가 그런 색을 발라요. 이런 거. 이런 게 이쁘지 않아요?”

세상에 이토록 이쁜 벽지가 있었을 줄이야. 흰색 바탕에 잔잔한 장미 무늬가 엠보싱으로 들어간 그 벽지는 너무 예뻐서 도저히 나의 누추한 집에는 도저히 바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저씨. 여기 회색 벽지 있는데요? 보세요.”

도배집에 동행한 나의 친구 리꼬가 먼지 쌓인 두꺼운 샘플 벽지 책자에서 무늬 없는 연회색 벽지를 찾아냈다. 나랑 리꼬는 너무도 기뻐서 날뛰는데 아저씨는 자기가 먼저 못 찾아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곤 나에게 70만 원을 달라고 하셨다. 70만 원? 아저씨가 내 돈을 걱정하신 이유가 다 있구나…. 하지만 내 마음속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열네 번째 집은 회색 벽지 하나로 북유럽풍 모던 심플 콘셉트의 원룸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열네 번째 집에서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났다. 하지만 정말로 조금의 후회는 없다. 1년 반 동안 정말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예쁘게 꾸민 집을 보여주고 싶어 친구들을 부지런히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혼자 있어도 좋았다. 남의 집에 임시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하는 생각에.


쫓겨 나와 이사 온 다음 집은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얼룩덜룩한 벽지는 그렇다 쳐도 장판이 너무 울어서 방 한가운데가 기다랗게 불룩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싱크대는 촌스러운 대리석 무늬에 높이는 내 골반보다도 낮은 구식이었다. 물론 집주인은 그 중 어느 하나도 교체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 집의 첫인상인 싱크대만이라도 어떻게 해보자는 생각에 아이보리색 페인트 한 통을 사다가 발랐다. 날벌레 시체 때문에 가운데가 시커매진 전등도 새 걸로 바꿔 달았다. 그렇게 한동안을 구석구석 손보고 나니 집과 조금은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뭘. 나 역시 이런 생각 때문에 항상 ‘임시’로 살아왔던 것 같다. 허름한 플라스틱 서랍과 여행용 식기 같은 것들을 가지고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10년이 지나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의 언젠가는 언제 오는 건데?


그래, 이제는 임시로 살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으로 작은 부분이라도 집을 고치고 가꾸기 시작했다. 여전히 남의 집이라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는 똑같이 2년을 살면서도 임시 인생을 산다는 슬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대 만족이다.


내 소유가 아니어도, 이 곳은 내가 사는 내 집이고, 비록 임대라 할지라도 이곳에서 풀어가는 내 삶은 결코 임시가 아니다.



이전 05화 전세자금대출 미스터리 : 집주인 동의의 비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