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열한 시
(전략)
... 다 재우고 나니 9월이 두 시간 남았다. 오늘 하려던 것들 중 한 가지만 빼고 어찌 해내긴 했으나 9월 내에 하고 싶던 것들(대부분의 목표는 예전보다 하향 설정되어 있지만)을 생각하니 약간 조급해짐을 느낀다. 그 두 시간 중에 싸이월드 백업을 할지 말 지 잠시 고민하다 그냥 두기로 했다. 여기까지 쓰고 잠시 숨을 돌리다 보니 (며칠 전 업데이트해 새로 생긴 기능인)'저전력'으로 설정해 뒀던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까매진다. 홈 버튼을 누르니 다시 화면이 켜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시 가상 키보드를 두드린다.
매일같이 어디선가 진행되는 '업데이트'를 따라잡기 버거운 사람이 됐다. 'm' 최신판을 가장 먼저 내려받아 친구들 집에 놀러 가 깔아주던 소년은 20여 년이 지나 OS 업데이트를 할지 말 지 며칠 동안 고민하고 지낸다. 업데이트를 하려면 저장공간이 필요하다. 저장공간을 무한정 늘리지 못하니 필요 없는 것들은 지우거나 어딘가 먼 곳에 옮겨야 한다. 저 생각보다 가깝지만 먼 곳에서 아마 뮤즈가 떼창을 유도하고 있을 것이다. 내 저장공간 속 뮤즈를 업데이트 하고 싶지만 이미 많이 차서인지 쉽지가 않다.
항상 열심히 사는 가족, 오랜 기간 목표로 했던 것을 달성하고 다음 달을 기다리는 선배, 오늘까지 마감이었던 이벤트에 성공적으로 응모한 동료, 그리고 점심 내내 일 때문에 통화해야 했던 동료, 나랑 같은 혹은 좀 더 뒤쳐진 것 같은 친구, 그리고 그럴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이도 생각이 난다. 푸념은 이제 그만 늘어놓아야지 최근 언젠가 결심했는데,
9월은 이제 딱 한 시간 남았다. 첫째 아이가 잠에서 깨서 잠깐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고 아내 옆에 다시 눕혔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꼽고 억지로 침대 옆 컴퓨터로 자리를 옮긴다. 목이 타서 맥주 한 병을 열었다. 컴퓨터가 방 안으로 들어온지 꽤 된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앉아본 것은 어제의 재택근무를 포함해 단 두 번째다. 구글 포토에서 desk를 검색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의 사진을 찾아 날짜를 확인하니 9월 16일, 책상을 안에 들여놓을 때만 해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세기말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하릴없이 두 주가 흘렀다.
그동안 <멍상의 시간>은 많았지만 기록보다 휴식을 택했다. 사실 글쓰기보다 남의 글을 읽는 게 더 좋다. 브런치에, 페이스북에 넘쳐 나는 글들은 나를 조금 더 편안히 잠들게 하는 것 같다. 나의 의식의 흐름 따위, 이상의 그것에 비한다면 무가치에 가깝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일지도 - 우라까이 기사나 배설에 가까운 것일지도 - 모른다.
멍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 달쯤 전에 옆 팀 팀장으로부터 '나사 하나 빠진 것 같다'는 말을 우리 팀장에게 전해 들었다. 회사에서 멍하게 있는 것은 나사가 빠진 공간과 같으니 어서 나사를 다시 주워 돌려 넣어야 할 일이다. 여전히 익숙하진 않지만 어릴 때보다 멍하기 어려운 걸 보면 (심지어 멍할 때도 쓰고 있다, 지금) 조금씩은 적응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멍한 것은 무가치 혹은 그보다 더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 취급을 받고 나니 이 곳에 쓰기가 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오늘은 브런치도 내게 메일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으니 그대의 친구를 이 곳에 초대하시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 친구에게 다음 주에 이 곳으로 초대를 해도 되겠는지 승낙을 구했다. 친구는 만화 비평을 하고 싶었다 했는데 난 이제 일 년에 두세 권의 만화책밖에 읽지 않아 같이 하긴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는 같이 만화를 그리자고 의기투합까지만 했던 친구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도 의기투합까지는 괜찮은 분위기인 것 같다. 아직 무얼 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의식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면, 아마도 끄적이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 훗날 별로 궁금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조선시대 노상추라는 분도 17세부터 죽을 때까지 일기를 썼다고 한다. 35세에 국가공무원이 되었지만 그리 큰 일을 하지 못하고 83세까지 오래 살았다고... 뭐 그렇다는 얘기다. 열한 시 사십육 분이다. 2015년 9월이 십 분 남짓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