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보이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세상. 사람들은 왜 자기를 고백할까. 바둑은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 가로 19, 세로 19의 바둑판이 결정한 세계. 바둑판이 무한하다면, 세상이 무한 캔버스라면 이기고 지는 게 가능할까. 이 땅이란 전체가 나라는 부분을 결정한다. 위로받기 위해, 이해받기 위해 ‘나’를 보여 주는 사람들.
— 드라마 ‘미생’
열다섯 살 하굣길, 아이스크림을 훔치는 아이들을 봤다.
같은 학교 남자애들이 환한 대낮에 동네 슈퍼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품에 감추고 낄낄거리며 도망쳤다. 펄럭이는 교복 바지 자락에 앙상한 다리가 드러났다. 땀 냄새가 날 것처럼 끈적끈적한 얼굴로 질주하던 그 아이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20대. 나는 아직도 거리를 거닐며 어떤 것을 관찰하고 홀로 숙연해지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껍질이 벗겨진 플라타너스 나무 기둥의 무늬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무늬라는 걸 아는가? 반짝이는 간판, 땀에 젖은 셔츠, 빈 커피 컵, 흐릿한 터널의 불빛, 흔들리는 강아지 꼬리, 구두 신은 여인의 까진 발뒤꿈치, 후드 점퍼,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 무언가를 골똘히 읽는 남자,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취객.
도로의 자동차는 쉼 없이 달린다.
모두 하루가 가기 전에 어딘가에 멈추겠지. 필시 무력한 다리로 내려서서 땅을 딛고 숨을 쉬며 걸어가겠지. 이곳에 나고 자라 몸을 움직이고 숨도 쉴 수 있는데 여전히 정답을 찾지는 못하지. 무엇이 ‘나’인지.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다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모두의 마음은 안녕할까.
나는 이 세상에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느꼈다. 무수히 많은 실이 엉킨 타래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딱 하나의 실을 찾지 못한 사람들. 갖은 이유 때문에 겨우 발견한 실을 놓아 버린 사람들. 그런 실 따위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나는 행복한 사람일까. 하루에도 맞다, 아니다, 수 번 바뀌는 생각. 나는 행복하다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것 자체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일까.
예쁜 정장을 입고 추하게 조는 사람을 보았다. 술에 떡이 돼서 자꾸 내 어깨에 머리를 박아 대는 원형 탈모 아저씨도. 연신 어깨를 맞다가 도망치듯 다른 자리로 옮겼다. 행복한 삶인가. 지친 듯 서서도 졸고 있는 사람. 어제도 늦게까지 원치 않은 야근을 했다는 아는 언니. 그리고 지난밤에 무심코 보았던 어느 고등학생들. 주택가 골목에서 담배 연기를 흩날리며 걸어 나오던 까무잡잡한 그 애들. 깡마른 허벅지로 어딜 그리 걸어가는지. 열다섯, 아이스크림을 훔쳐 달아나던 무리를 목격했던 게 다시 떠올랐다. 모두가 그 애들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까슬한 모래 한 줌을 품고 사는.
나는 참 사람에게 관심이 많구나.
언제부턴가 그랬다. 그네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눈물이 났다. 다들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너무 힘들어 보여서. 왜? 왜 이렇게 살아가는 걸까? 다들 무엇을 목적하고 있을까? 그 목적한 바에 다다르고 있는 걸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회가 정말 옳은지, 그런 생각을 자꾸 했다. 낭만을 쫓는 이유는 다 행복하지 않아서라고.
나보다 밝은 사람을 만나 나를 숨기고, 나를 걱정하는 사람을 만나 울음을 삼키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듯 어색한 공기 안에서 침묵하며, 그렇게 모두 화를 키운다.
세상에는 화가 넘쳐 난다.
어쩌면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다들 특별한 사람이고 싶어서다. 서로에게든 자신에게든.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잔인해진다. 총알처럼 허공을 가르며 서로를 베는 말들이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쳐 버렸다.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베개가 차가웠다. 이곳에서 어떻게,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 말해야 이해받지? 사는 건 참 지겹다. 미래는 과연 행복할까?
상담자는 나에게 당신은 우울하다고 했다.
아, 뭐 그렇구나. 그게 내가 힘든 이유구나. 정말? 정말 단순히 우울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나는 세간이 정한 ‘보편’의 기준에 맞지 않았다. 남들은 당연시하는 무언가에 늘 질문을 던졌다. 쉽게 불편해하고 아파하는, 이 땅의 티눈 같은 존재였다. 그래.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랬다.
가만히 누워 있고만 싶었다. 하염없이.
이불 속에서 픽션에만 빠져 살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할 때는 불안하지 않다가 모든 걸 덮고 현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불안이 덮쳐 왔다. 그러다 다시 픽션으로 향하는 재생 버튼을 누르면 거짓말처럼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러다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아침이 밝아 오고 날이 따뜻해지고 밖이 떠들썩해질수록 나는 더 가라앉았다. 아래로, 안으로, 구석으로….
외출하면 세상의 화가 내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소진된 채 돌아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나를 상처 입히는 것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저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존재한다고. 쉽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버리지만 나 또한 위로받기 위해, 이해받기 위해 나를 보여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의 글은 그렇게 쓴 문장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다시 행복해진 것 같다가도 우울은 불시에 계속 찾아왔다. 글을 쓰며 나 같은 사람은 ‘우울증’이니 ‘대인 기피증’이니 하는 증세로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우울이라는 건 마치 스위치 하나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다들 우울에 그렇게나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사람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게 서글펐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 같았다.
주목할 건 우울의 정의나 원인, 치료법이 아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과 일상의 결, 그것에서 포착한 그들의 감정과 마음을 느끼는 것. 다 필요 없고 그저 누워 있고만 싶은 사람들이 평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복잡한 존재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서사다. 우리는 매일 놀라우리만치 유기적이고 흥미로운 개개인의 서사를 맞닥뜨리며 살아간다. 그리도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로 살아가면서 어째서 우리는 나를, 너를, 우리를 아프게 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을 경시하고 물질만을 좇아 사는가. 우리는 왜 나와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런 현실이 나는 왜 그리도 아픈 걸까.
한 명의 청년으로서, 한 명의 우울한 사람으로서, 한 명의 와식인간(臥式人間) 내향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숭고한 우리네 마음에 바치는 헌정 에세이. 중심과 주변, 그 사이 이방인의 세계를 끊임없이 방황하는 사람에게 넌지시 손을 건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