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담임한테 따귀를 맞은 적 있다. 3학년 때였는데, 숙제 발표를 머뭇거렸다는 이유에서였다.
담임은 무작위로 반 아이를 골라 숙제 발표를 시키고는 했다. 그날은 내가 걸렸다. 나는 숙제를 했지만 내 숙제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너무 못한 것 같아 발표를 망설였다. “숙제 안 했니?” 담임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어물거렸다. 담임이 다가와 내가 한 숙제를 확인했다.
그녀는 날 앞으로 불러내서 왜 숙제를 해 왔으면서 발표를 안 하냐고 소리친 뒤 내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대답을 해, 대답을!”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발표를 하는 게 무서워서요….”라고 웅얼대며 얼어붙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이 안 떨어졌다. 선생님이 내 얼굴을 때렸어. 이 말만 하면 되는데 목구멍이 턱 막혀 냉장고 채소 칸을 정리하는 엄마 옆에 서서 방해만 했다. 아마 ‘뭘 잘못했길래 맞았어!’ 같은 반응이 무서웠던 것 같다. 그래서 빌라 옥상에 올라가 혼자 울었다. 그때 키우던 토끼가 있었는데 그 애를 안고 우느라 내 눈물로 털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다음 날 억지로 학교에 갔다. 담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 따귀가 내 소심함을 용기로 바꿔 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그녀의 착각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사건과 갈등을 겪는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오해받아 울고,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산다. 엄마의 이혼, 친아빠의 죽음, 친한 친구나 가족과의 다툼, 전 남자 친구들과의 이별 등. 나 또한 담임한테 뺨을 맞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은 여러 경험을 겪어 왔다.
이런 경험들은 내가 마음속에 가진 흉터의 일부다. 이미 잊고 극복했지만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험이 흉터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만의 흉터를 가진 채 살아간다.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되면 이야기할 때 그다지 감정의 동요가 없지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흉터가 되지 못한 상처는 건드리면 아프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떤 상황에서 욱하며 감정이 북받쳐 오르거나 화가 나거나 혹은 눈물이 고일 때, 그건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그때 우린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안에 감추어진 상처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돌봐 줘야 한다.
대학교에서 심리학 교양 수업을 들었다. 강의명은 ‘감정과 삶’이었고 임상 심리를 전공하신 교수님이 강의를 진행했다. 첫 시간에 교수님은 행복, 슬픔, 화 등 우리가 가진 감정의 기능과 의의를 이해하는 것이 강의의 목적이라고 했다. ‘감정은 통제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게 강의 전체를 꿰뚫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교수님은 매번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슬픔과 우울은 나약한 감정이고 눈물은 얼른 닦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른들이 사내아이에게 하는 말만 잘 들어 봐도 알 수 있다. ‘남자는 살면서 딱 세 번 우는 거야.’, ‘남자는 강해야 해.’, ‘남자가 쩨쩨하게.’ 같은 말들. 나는 이런 말들이 너무나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와 같은 선입견 때문에 자신의 눈물과 상처를 숨기고 억누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슬픔은 때로 혼자서는 극복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익명 게시판에 고민을 올리거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음악이나 영화를 찾는다. 만약 슬픔을 타인과 공유했을 때 공감받지 못하면 화가 나는 등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 ‘뭐 그런 걸로 울어?’, ‘그런 건 힘든 일도 아니야.’ 이런 식의 반응을 보자고 사람은 슬픔을 표현하는 게 아니다.
내 감정이 타인과 제대로 공유되지 않으면 화살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문제야,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잘못된 거야.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가 미워지고, 그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걸 불편해하게 된다. 어떨 땐 억지로 웃거나 자기보다 더 불행한 타인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며 고통을 행복으로 위장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각본은 이런 심리학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영화에는 주인공 라일리의 마음속에서 슬픔을 담당하는 울보 겁쟁이 ‘슬픔이’가 나온다. 슬픔이가 하는 거라곤 뒤로 빼고 걱정하는 일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슬픔이다. 감정의 주인공 라일리가 이사를 간 뒤 부모님에게 화를 낸 이유는 향수병 때문이었는데, 슬픔이가 나서지 않으니 그 원인이 표출되지 않고 억압됐다.
라일리의 기쁜 감정을 담당하는 ‘기쁨이’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 슬픔이에게 문제를 맡기니 화의 이면에 있던 본질적인 슬픔이 표현된다. 라일리가 울음을 터뜨리고 슬퍼하자 부모님은 라일리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태도를 이해한다. 영화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성찰하고 제대로 우는 법을 배워야 함을 말한다.
슬픔의 표현은 사람들이 위로를 하도록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리고 슬퍼 본 사람이어야 타인의 슬픔을 쉽게 공감하고 알아차릴 것이다. 슬픔은 내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슬픔의 메시지를 들어야 내 삶에 어떤 가치와 욕구가 빠졌기에 내가 불행한 건지 깨닫고 문제 해결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또 영화는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무시하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만약 라일리의 부모님이 ‘뭐 그런 걸로 울어?’라고 말하며 라일리가 기껏 표출한 슬픔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슬픔이는 ‘역시 내가 나서면 안 돼.’라며 다시 뒤로 숨어 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감정들이 대신할 것이다. 감정을 자주 외면당한 사람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과 관계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
감정과 삶 수업을 듣기 전에 시 창작 수업을 들은 적 있다. 교수님은 시인이었다. 그는 세월호 사건 이후 ‘한번 울음이 터지면 멈추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어느 날 수업 중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다. 교수님이 세월호 희생자 중 한 학생에게 줄 추모시를 지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시를 짓고 학생 부모님 앞에서 낭송회를 했다고 말하는 중, 갑자기 교수님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병이 어떤 건지 그때 알았다. 결국 그날 남은 수업은 취소됐다.
그때는 감정 표현의 중요성을 몰랐던 때여서 교수님의 그런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눈물을 멈추지 못할 만큼 교수님 마음에 슬픔이 너무 많았다는 걸. 눈물이 계속 나는 이유는 충분히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감정을 꺼내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문학인의 상상력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과 같다고 배웠다. 타인이 가진 긍정의 감정을 넘어 고통까지 느끼는 그 상상력은 정말 멋진 능력이다. 나는 감히 그 눈물을 우습게 여길 수 없었다.
“슬픔과 두려움 등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이 왜 아직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가? 불필요하다면 꼬리처럼 진화 과정에서 없어져야 맞는 것”이라고 심리학 교수님은 말했다.
어떤 감정이든 없어도 될 감정은 없다. 모든 감정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우리는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타인과 소통한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첫 단계가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울고 싶을 땐 솔직하게 마음껏 울어야 한다. 생각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누구에게든 포옹과 위로는 필요하다. 감정 또한 나의 일부이므로, 거부하는 순간 자아에는 균열이 생겨 버린다. 슬픔과 두려움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 보살필 때 우리는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