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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Jul 26. 2024

설레지 않는 삶이라는 재난

제가 먼저 퇴사해 보겠습니다


요즘 자주 이런 상상을 한다.


정오경, 소박하지만 햇볕이 잘 드는 집에 앉아 배터리가 빨리 닳는 것 말고는 아직은 멀쩡한 구형 맥북 에어로 그나마 돈이 되는 일을 하면서 직접 만든 아이스 라떼를 마시는 나. 부엌 찬장에는 집처럼 소박한 그릇과 귀여운 텀블러가 놓여있고 침대는 언제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햇살 내려앉는 어딘가에 등을 대고 뒤집어진 채 고롱고롱 자고 있는 나의 고양이. 그런 평화로운 낮 한때.


그러다가 밥때가 되면 냄비에 칼칼한 콩나물국 한 소끔 끓여 국그릇에 담고 쌀밥 조금과 제철 나물 반찬을 내어 소박하지만 건강한 식사를 하고, 그러다가 밤이 되면 따뜻한 차 한 잔 우려 글을 쓰는 나. 어떻게든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나.


이렇다 할 명품은 찾아볼 수 없다. 한차례 미니멀리즘 파도가 지나간 드레스룸에는 편하게 입기 좋은 체형에 맞는 옷과 잘 관리된 질 좋은 겨울 외투 몇 벌뿐이다. 가벼운 마음은 가벼운 몸에서 온다고 믿기에, 내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은 가볍고 산뜻하며 제 기능을 충실히 해낸다.


하루 중 마주치는 사람은 쓰레기봉투를 사러 간 편의점의 계산원이나 언제나 조금 더 큰 마들렌을 챙겨 주려고 하시는 단골 카페 사장님을 빼면 없다. 동거인이 있다면 아마도 내가 내 모든 모습을 보여도 된다고 느끼는 사람이자 사랑하는 연인이겠지. 호모 센서티브(‘호모 센서티브’에 대한 정보는 이전 책을 참고하시라)이기에 작은 외부 자극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 나에게는 딱 맞는 크기의 인간관계다. 다음 모임을 약속한 몇 없는 소중한 친구들에게 줄 소소한 선물을 잠깐 고민하고. 그러다 문득 내가 가진 이 소박하지만 반짝이는 보석 같은 인연들이 고마워 빙그레 미소 짓는다.


혼자 일하는 것, 쓰는 것, 이야기를 짓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을 드디어 숙명으로 받아들인 나의 평화로운 일상은 그러하지 않을까. 언제나 깨끗이 관리되는 집에서, 언제나 평온한 마음으로, 물질은 적지만 정신은 풍요롭게 지내는 하루하루.


내가 품고 있는 이상과 자아에 조금도 어긋남 없는 그런 나날들.


.

.

.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눈을 뜬다.


햇볕 내려앉은 정오의 한때는 온데간데없다. 나는 차가운 온도가 팔목에 배어드는 칙칙한 데스크에 앉아있다.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창문마다 회색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공기가 무겁다. 오전 10시, 2023년 개인 평가 점수가 공개될 시간이다.


다행히 내 평가 결과 칸에는 1인분은 했다는 의미의 점수가 박혀 있다. 막 눈에 띌 정도로 잘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너무 못한 것도 아닌. 그 밑에는 건조한 말투로 1차 평가자와 최종 평가자의 평가가 한 줄로 적혀 있다. 대충 한 해 동안 고생 많았고 24년도에도 멋진 역할을 기대하겠다는 말이다.


나는 잠시간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잔뜩 힘줬던 명치를 이완시켰다.


연봉이 올랐다. 전직한 업계에서도 어느덧 2년 차가 된 나는 이제 1년에 5,000만 원 정도를 번다. 물론 세금을 떼면 훨씬 적어지지만, 예전 같았으면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액수임은 분명하다. 적당히 나쁘지 않은 일, 나름대로 규모 있는 안정적인 회사, 동종업계 사람이라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빵빵한 복지. 그러나 나는 정확히 내가 꿈꿨던 이상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다.


이곳은 따뜻하지 않고 차갑다. 밝지 않고 어둡다.


너무 많은 사람, 사람, 사람. 너무 많은 이야기, 물질, 평가… 모든 게 자극적이다.


자아실현? 당연하게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뾰족한 별 모양 틀에 끼워 맞춘 동그란 내 몸이 아프다. 언젠가 이 틀에서 나오면 나는 무슨 모양일까. 별 모양일까? 아니면, 원래대로 동그란 모양일까?


2019년 내가 쓴 ‘돈을 많이 벌고 싶지 않다는 게 이상해?’라는 글에는 이런 문장들이 있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싫은 걸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성인이다. 내가 원하는 일을 고를 자격이 있다. 남들 기준에 무조건 맞추지 않을 자격도.」

「우리는 왜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해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024년의 나는 내가 생각했던 ‘불행한 삶’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법륜 스님은 말했다. 성인이 되면 이미 ‘자유인’인데 뭐 하러 남의 눈치를 보면서 불행하게 사느냐고. 그러게요, 스님.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죠?


사내 메신저에서는 팀장님이 개인 평가 공개에 대한 공지 사항을 알린다. 내가 이 회사에 아주 필요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단 하나의 알파벳으로 증명받고 안도한 동시에, 내년에도 이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겠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 공지를 읽었다. 조금 숨이 막히는 것 같다.


팔목에는 여전히 시린 온도가 배어든다. 역시 장패드를 주문해야 할까. 아니야. 이사할 때 귀찮고 번거로워. 때도 타고 … 생각의 줄기가 시답잖게 이어진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불현듯 작년 여름 진행했던 퇴사 면담까지 생각 줄기가 뻗는다.


나는 분명 이 회사와 영영 헤어질 결심을 했었다. 작년 여름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이 나의 이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순 ‘가짜 인생’이라고 결론 내렸다. 열심히 최적의 퇴사 날짜를 정하고,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어쩌다 계속 여기 있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턱을 괴고 그런 고민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었다. 먹고사는 시간. 그래, 먹고살기 위해서였던가?


직장 동료 Y 님이 식사를 하자며 다가왔다. Y 님은 내일 퇴사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리고 회사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라고 했다.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까지 빌렸다고 했다.


그녀와 식사를 하러 내려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한 번이라도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본 적이 있던가.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내가 가진 이상을 존중해 본 적이 있던가.


먹고살아야 해서, 경기가 안 좋으니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더 늦기 전에 정착해야 한다고, 나중 가서 생각이 바뀌면 어떡하냐고….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어?



그 언젠가 내가 그토록 싫어 마지않았던 말을 이제는 내가 내 마음에게 외치고 있었다.


가장 되고 싶지 않았던 인간이 되어버린 나.


급기야 나는 디스토피아 영화 한가운데 서서 온몸으로 토네이도를 맞닥뜨리는 듯한 감정에 이르렀다. 지금 내 인생에는 아무짝에도 설레는 구석이 없으며, 내일이 기대되기는커녕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 나는 ‘설레지 않는 삶’이란 재난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테이프를 되감아 보기로 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던 반년 전 그날로 테이프를 되감아서, 되짚어 보려고 한다.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말을 하게 되었는지. 내가 진짜로 살고 싶은 인생, 이상에 가까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똑같이 외쳐보려고 한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퇴사시켜 주세요!”


이 글은 일상적인 도로나 전철역에서 지나치는 당신과 비슷한 어느 소시민의 발악처럼 보일 수도 있다. 혹은 ‘평범한’ 사람보다는 좀 더 힘들고 괴로운 경험을 많이 한 어느 탈가정 청년의 생존 고군분투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이 지구에서 인간으로 너무 살기 싫어서 철학을 과도하게 흡입해 마침내 블랙 코미디에 이른 사람의 해탈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이 글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직 하나다.


‘자유인’! 자유인이 되어 설레는 삶을 살자.


하지만 섣불리 그러긴 힘드니, 내가 먼저 해보고 결과와 방법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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