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가 느껴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썅년아, 쌩까냐?”
꿈이 접혀 사라진다. 나희는 어느 해 겨울 동안 점원으로 일했던 낚시 가게 카운터 뒤인 것 같은 장소에 앉아서 외로움을 곱씹는 꿈을 막 꾸고 있었는데, 생시에는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않게 된 그녀로서는 꿈속의 그 감정이 어릴 적 친구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생생했던 그 꿈을 찢고 들어온 목소리는 젊은 남자의 것이다.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희의 곁에 와서 거친 말을 하고 있었던 건가.
“썅년아, 죽을래?”
낮게 속삭인다. 나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주의 깊게 듣는다. 격한 감정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억누르고 있는 심정에 비하자면 입으로 내뱉는 어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억울함이 전해진다. 어두운 밤에 욕설로 협박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희는 전에 겪었던 비슷한 경험들을 통해 즉각적인 반응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잠이 깨지 않은 척하며 시간을 번다.
아마도 자정은 지났을 것이다. 이 시간에 산 중턱 나희의 침낭 옆에 와있는 이 사람은 오늘의 일행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여섯 명 중에서 남자는 둘이다. 정뱅이라는 닉네임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였고 덩치가 컸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야영이든 노숙이든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참가 신청을 한 것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서인 것 같다고, 나희는 짐작했다. 야영지까지 올라오는 내내 그는 요가 강사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영우라는 이름으로 인사를 한 남자는 언뜻 보면 미성년자 같기도 했지만 스스로 회사원이라고 밝혔다. 아무리 동안이라고 해도 서른 살이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나희는 지금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거친 말을 하고 있는 남자가 그 두 명 중 누구일지 따져본다. 역에서 만나 인사를 했을 때부터 죽 떠올려본다. 두 남자의 목소리를 모두 들었지만 둘 다 별다른 특징이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쌩까면 다냐?”
나희를 전부터 알았다는 뜻인가? 전부터 알면서 나희에게 원한이 깊은 서른 살 미만의 남자가, 있을까? 잊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기억하는 방식을 바꾼 자신의 과거를 꺼내 뒤진다. 나희가 남들에게 못 할 짓을 많이 했던 시기는 멀리 떠나기 전, 그러니까 십여 년 전쯤에 집중된다. 지금 이 남자가 일행 중 한 명이 맞는다면 십 년 전엔 그가 10대, 아무리 많아야 스무 살쯤이었을 것이다. 애매하다. 당시 나희가 부딪혔던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나이가 많아야 한다. 부모님의 원수, 라는 말이 툭, 떠올랐다. 그러나 십여 년 전 나희가 잘못했던 사람들의 자식이라기엔 또 너무 많은 나이다. 부모, 자식. 나희는 아주 오래전에 낳자마자 헤어진 딸을 떠올리고 만다.
“태연하게 처음 보는 척 잘도 하더라? 찢어 죽일 년, 너 때문에 씨발, 응? 너 때문에 우리가, 하….” 욕설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다시 이어진다. 듣기만 해도 얻어맞는 것처럼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