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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희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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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호 Oct 29. 2024

나희의 과거

지붕도 못 갖고 근근이 살아갔을 뿐이었다

  눈을 떠서 얼굴을 볼까, 일어나 앉아서 마주 상대할까, 망설인다. 그러다 생각이 바뀐다. 나희는 이 남자가 자신이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작은 소리로 휘파람 못 부는 사람이 휘파람 부는 것처럼 속삭일 리가 없다. 정면으로 상대하고 싶었다면 나희를 만나기 전에 자신을 알렸을 것이다. 역에서 만났을 때라도 따졌을 것이다. 나중에야 욕을 할 마음이 들었다 해도 최소한 지금보다는 큰 소리를 냈을 것이다. 흔들어 깨우는 시도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남자는 나희가 듣든 말든 욕을 하고, 그냥 거기까지만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희는 눈을 더 꼭 감는다. 

  이 사람은 언제 보았던 누구일까? 십여 년 전 감옥에 간 동업자에게 띠동갑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일까? 그 무렵 나희가 돈을 갚지 못한 탓에 살고 있던 아파트를 잃은 조 관장에게 한집 살던 어린 처남이 있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그일까? 남 사장의 아내가 나희의 머리채를 잡고 쇼룸 바닥에 내리꽂았을 때, 넘어져 있는 나희의 얼굴 옆에 침을 뱉었던 소년이 있었다. 그일까? 나희는 자신이 과거에 보았던 어떤 어린아이를, 소년을, 청년을 기억해 보려 애쓴다. 애쓸수록 궁금해진다. 궁금한 마음이 커지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느꼈던 무서움이 조금 물러난다. 

  어쩌면 한국을 떠나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에 많은 죄를 지었기에 먼 기억을 우선 뒤졌지만, 문득, 떠난 후에 죄를 짓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희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알고는 있었지만 깊이 생각 못 해본 문제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어디에서였을까…. 그곳에서 나희는 누구에게 못 할 짓을 했던가. 그녀는 지붕도 못 갖고 근근이 살아갔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5년 전,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달랐나? 귀국한 이후에 만난 사람일 수도 있다. 나희의 추리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전에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희를 잘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희는 가희였다. 원래 이름이 그랬다. 돌아와서 이름을 바꿨다. 가 다음은 나니까 나희로 했다. ‘아름다울 가(佳)’자는 어릴 적 그녀에는 그럭저럭 어울리는 글자였는지 모른다. 돌아온 그녀는 지나온 삶 탓에 외모도 많이 변했고 더는 예전의 가희가 아니게 되었으므로 나희가 되었다. 사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죄짓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묻는다.

  “너는 뻔뻔하게, 아직도 살아있냐?” 

  죽고 싶었던 적 많았다. 죽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시장 골목 반찬 가게에서 재료 다듬는 일을 하던 시절, 그 상점가에 큰불이 났었다. 나희가 일하던 곳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생선 굽는 가게에서 시작된 불이어서 소방차가 오기 전까지 그녀는 불 가까이에 있을 수 있었다. 눈앞의 큰불은 일상의 감각을 정지시키고 나희가 덮어두었던 어떤 생각을 확 들춰내었다. 노포가 화염에 싸여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며 불길 쪽으로 몸의 무게 중심을 옮겼다. 한발 다가갔고 다시 한 발을 떼었다. 단번에 뜨겁고 말 것 같아서 나희는 이끌렸다. 한 걸음 더 들어갔다. 그리고 한 걸음만 더 들어갔으면 돌이킬 수 없었을 거였다. 나희는 그 전에 돌이켰다. 한 번 더 걸음을 앞으로 내딛기 전에 덜컥,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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