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 소리가 최대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그래, 잘났다고 내빼봤자 니가 별수 있을 것 같냐? 썅년아, 니가 별수 있을 것 같냐고….”
목소리에서 점점 더 힘이 빠지더니 처음의 살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도 하다. 남자는 울먹이기 시작한다. 낮고 작게 속삭이던 음성에 울음 삼키는 소리가 섞인다. 그 소리는 웃음을 참는 소리와도 비슷하다. 나희는 그것이 정말 웃음소리일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웃는 것은 좋지 않다. 위험 신호다. 지붕 없이 오래 지낸 그녀는 그런 것을 알고 있다.
“삐익, 삐익, 삐이익.”
어느 딱새가 이 깊은 밤, 저런 울음을 우나. 힘껏 호루라기를 불 때 나는 소리 같다. 새 소리에 뒤척이는 척 나희는 옆으로 누운 방향을 바꾸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튼다. 비비커버 상단 그물망을 머리카락으로 가리도록 자세를 잡고 한쪽 눈만 가늘게 뜨는데, 일어나 걸어가는 발만 보인다. 청바지 밑으로 새로 사 신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흰 운동화다. 발만 봐서는 정뱅과 김영우 중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발은 대여섯 걸음 걸었다가 뒤돌아 다시 대여섯 걸음 걷기를 반복한다. 남자가 일어나 움직이는 이유가 단지 안정을 찾기 위해서길 나희는 바란다. 어떤 공격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움직임은 아니길 바란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 비겁하지만 살고 싶다. 모든 소망을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마지막 소망이다.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소망이 염치없게 느껴질 때는 공연히 자기가 이제까지 한뎃잠 자며 고생한 일들을 갖다 붙인다. 갖다 붙이면서도 쓸데없는 짓인 걸 안다. 알지만 그거라도 안 할 수 없다.
한참 왔다 갔다 하던 남자가 한자리에 멈춰 선다. 딱새가 다시 운다. 울고 난 정적 끝에 다시 딱새 소리가 나는데, 이번에는 아까 울었던 새가 아니고 또 다른 새인 것 같다. 소리가 울려오는 방향이 다르다. 그리고 미묘하게 조성이 다르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이익.”
“그렇게 도망 다니고, 도망쳐서 겨우 여기냐? 겨우?”
이제 남자가 서서 말을 하니 목소리가 더 작게 들린다. 나희는 간신히 알아듣는다. 나희는 억울한 기분이 든다. 죽었으면 이런 억울함은 없었을까? 안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되느니 억울해도 산 사람이 되는 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었는데.
“흙.”
밤의 소란에 또 하나의 소리가 더해진다. 흙, 이라고 들렸다. 사람의 소리다. 나희는 온 신경을 기울여 그 소리에 집중한다.
“흙, 흙.”
여자의 울음소리다. 나희는 그것이 자신의 침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워있는 귀욤, 이라고 자신을 밝힌 중년 여자의 음성인 것을 알아차린다. 그녀가 울고 있다. 울음소리가 최대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꾹꾹 누르며 울고 있으나 희미한 흙, 소리가 새어 나온다. 흰 운동화를 신은 발이 흙 밟는 소리를 내면서 멀어져 간다.
어둠 속 목소리가 나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다. 풀리면서야 그 긴장이 얼마나 단단했었는지 깨닫는다. 나희는 밤의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횡으로 불자 나뭇가지들이 운다. 새도 울고 벌레도 운다. 멀리 산 아래 강변북로엔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다. 차 안엔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들에겐 목적지가 있을 것이고, 설사 지금 목적지를 모른다 해도 결국엔 어딘가에 닿게 되겠지. 나희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리는 자신을 상상한다.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홀가분해져서 저도 모르게 잠으로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