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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희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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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호 Oct 29. 2024

비박 인솔

이렇게 자주, 그리고 오래 하게 될 줄 몰랐다

  책을 내게 될 줄은 몰랐다.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 일자리와 살 자리를 쫓다 보니 여러 곳을 떠돌게 되었는데, 그것이 남들의 눈에는 여행처럼 보였나 보다. 상당히 길고 특이한 여행. 귀국한 해 겨울에 숙식이 되는 찜질방에서 일하면서 나희는 비번 때마다 매점 옆 피씨방에 처박혀 자신의 경험을 블로그에 글로 썼다. 나가서 쓸 돈도, 따로 만날 사람도 없었다. 하루 평균 서른 명 안팎의 블로그 방문자 중에 의욕적이지만 경험은 부족한 편집자가 있었고, 몇 가지 상황이 맞아 돌아가 나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책을 냈다. 편집자의 손을 거쳐 자세한 돈 얘기가 쏙 빠지니 나희의 이야기는 꽤 그럴싸한 여행기처럼 되었다. 1쇄가 거의 다 팔렸지만 2쇄를 찍지는 않았다. 책을 만든 편집자는 퇴사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출판기념 이벤트였던 비박 행사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 할 때는 이렇게 자주, 그리고 오래 하게 될 줄 몰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걸 하고 싶어 할지, 그런 사람들이 계속 있을지, 나희의 머리로는 전혀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그런 걸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다른 누군가라면 전망을 소망과 섞을지 모르겠다. 나희는 그러지 않는다. 소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나희는 여러 번 경험했다. 이제 나희는 아무것도 원하거나 바라지 않기로 노력한다. 특히나 돈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소망도 품지 않기 위해 애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을 때까지 한뎃잠을 자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비박을 인솔하며 나희는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다음 날 헤어질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인지, 굳이 왜 할까 싶은 이야기까지 하는 사람도 많았다. 우물 속처럼 까만 밤하늘을 보면서 땅이 차게 식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평소에는 꺼내지 않던 얘기들이 길어 올려지게 되나? 사람들이 가장 자주 꺼내는 얘기는 자신이 매일 하는 일에 관한 것들이었다. 남이 들으면 심각할 것도 뭣도 없는 그런 얘기들. 그러나 자신에겐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의 인생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일에 관한 얘기들.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에 관해 품은 회의를 그녀에게 슬며시 털어놓곤 했다. 매일 하는 일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들 했다. 

  금테 안경 안 눈매가 날카로워 보였던 냉면 기술자는 경력이 9년째인데, 자신이 뽑는 그 많은 면을 매일 같이 누군가가 다 먹는다고 생각하면 주방 밖 세상이 너무 넓고 막막하게만 느껴져서 일이 끝나도 바로 못 나가고 늘 꾸물거리게 된다고 했다. “밥도 아니고 냉면인데 말이죠.” 목소리가 작았던 광업신문 기자는 사실 자기는 광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협회 회원들을 돌아가며 취재할 뿐이며 그들이 곧 독자들인데 독자들이 광업에 대해 더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쓰는 기사를 읽을 필요가 없지만 자기는 어쨌든 기사를 쓰고 협회에서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다달이 급여 통장에 찍히는 액수는 뭘 증명하는 걸까요.” 새치가 많았던 수학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것도 분명하고 일부 학생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도 분명하나, 두 행위가 어떻게 상관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끝까지 모르거나 알아들었다가도 곧 잊어버리거나 가르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무력감의 대가로 연금까지 받는다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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