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걱정했지만, 아침이 되자마자 거짓말같이 파란 하늘 아래로 꽃잎 같은 햇살이 내리었다.
'뽀드득뽀드득’
언제 들어도 재밌는 눈 밟는 소리,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걸어온 길만큼 일정한 보폭으로 찍힌 내 두발 자욱 모양이 ‘이 드넓은 들판의 주인이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주인자리는 이 쌓인 눈들이 녹아버리는 동시에 사라질 것 같지만 말이다.
엉뚱한 생각을 하다 앗차!, 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발목까지 쑥쑥 꺼지는 눈길을 걷는 건 쉽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 양팔을 허공에 휘젓다 보니 감각이 없을 만큼 얼어버린 두 손을 입김으로 녹이기 위해 자꾸만 멈춰서는 바람에 가는 길은 자꾸만 더뎌졌다.
아마 지금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걷고 있었다면 항상 따뜻했던 그녀의 손이 나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겠지?
그녀는 오늘같이 눈이 내린 추운 겨울날이면 뜨거운 커피가 아닌 핫초코 위에 마시멜로우를 올려 조심스럽게 마시곤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키스를 하고 나면 내 안에도 온통 따뜻하게 데워진 초코향으로 가득했는데, 오늘도 그녀는 핫초코를 마셨을까?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사진작가로 이름을 꾀나 날리고 있었던 그때의 나는 오만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것에 짜증을 냈고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다보니 주위에 사람들 모두 나를 피했지만,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인줄도 몰랐었다. 그랬던 내 앞에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보충한 스텝 중 한 사람으로 그녀가 내 세상에 나타났다.
그녀의 첫 느낌은 백설공주.
윤기 흐르는 검은 단발 아래로 흰 눈 같이 새하얀 피부에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랗고 선명한 눈매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담고 있었으며, 작고 오뚝한 콧날과 눈 위로 피어난 붉은 동백꽃잎 같은 입술을 가진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로 인해 메말랐던 내 안을 사랑이라는 물방울들로 촉촉이 적시며 잠들어 있던 여러 감정의 새싹들을 틔우고 꽃들을 피워내면서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미소는 내 삶을 천국으로 끌어올렸고, 그녀의 눈물은 나를 지옥으로 밀어낼 만큼 나의 모든 것은 그녀로 가득했다. 그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했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맞잡은 그녀와 내 손이 떨어지지 않기를 매일 기도했으며, 그녀를 향한 내 사랑과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수시로 확인했다.
누구보다 반짝이던 그녀는 늘 소탈하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언제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고, 누구에게나 가식 없이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에 못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사랑과 믿음을 담고 있는 두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품에 안겨올 때면, 잠시잠깐 나를 사로잡았던 못난 감정들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오늘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또 골랐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하겠지만, 내가 빈손으로 가긴 싫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던 행복한 시간들, 그때 별모양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적당하고 가운데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어 고급스러우면서 귀여운 느낌이 그녀와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적지 않은 값을 망설임 없이 치르며, 예쁘게 포장해 달라는 같은 부탁을 몇 번이나 했었다.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니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온기가 사지로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그녀가 있는 곳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의 심장은 주인 허락도 없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고, 쌓인 눈을 헤치고 걸어와 지친 두 다리에도 다시 힘이 생겨 빠르게 빠르게 앞을 향해 달려가듯 나아갔다.
"나왔어, 오랜만이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인사하자, 변함없는 모습의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향해 웃는 듯하다.
6년 전 나는, 그녀를 살해하고 이곳에 묻었다.
주위는 온통 흰 눈이 쌓여 모두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랑하는 그녀가 누워있는 자리를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이곳은 10여 년 전 사진 촬영을 위해 답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나만의 장소였다.
나는 잠시 그대로 주저앉아 그동안의 일들을 그녀에게 다정스럽게 말해주며 주머니에 있던 선물 상자를 꺼내어 놓고 쌓은 눈을 헤치고 차갑게 얼어 있는 땅을 미리 준비해 온 작은 칼로 파내기 시작한다.
"네 말이 모두 맞았어, 처음 우리 사이를 다른 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을 때는 많이 섭섭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나를 살렸지 “
생각보다 단단하게 얼어버린 땅을 파는 게 쉽지 않자 잠시잠깐 쉬었다, 다시 예리한 칼날을 이용해 구멍을 파내기 시작하며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찾아와 행방을 물으면서 흔적을 찾을 때도 우리의 관계를 아무도 몰랐기에 나는 금방 그 일과 무관한 사람이 되었고, 이렇게 아무 어려움 없이 너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거야, 진짜 너는 완벽한 여자라니까"
그리고 선물상자를 열어 선물로 산 다이아가 박힌 별모양 목걸이를 꺼내어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가늘고 흰 목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샀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그리고 제법 깊이파인 구멍 속으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흘려 넣고는 다시 흙을 덮고 그 위에 눈을 조심스럽게 올려둔다.
"널 죽일 때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던 그 모습보다 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했던 네 두 눈동자가 충격과 공포, 절망의 빛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는 거였지... 하지만 완벽한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널 원하는 이들이 많았잖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날 끝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던 너에게도 잘못은 있는 거고”
나는 그때의 괴롭고 슬펐던 시간을 잠시 떠올리다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갈게,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할 일이 많아서 당분간은 많이 바쁠 것 같아, 그래도 장미가 피어날 때쯤 네가 좋아하는 꽃들을 한 아름 안고 찾아올 테니 너무 외로워하지 마, 잘 있어 내 사랑~”
그녀를 만나고 되돌아오는 길.
왔던 길을 따라 찍힌 내 발자국 위로 또 다른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가던 중, 하늘거리며 춤을 추듯 눈송이가 날리는 듯하더니 세워둔 차에 도착했을 무렵, 눈은 또다시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확인해 보니 오늘 오후부터 큰 눈소식과 함께 밤사이 폭설에 대한 경고 예보가 있었다.
꽁꽁 언 몸을 차량히터의 열기로 녹이며 음악을 틀자, 부드러운 음색의 여성 보컬이 부르는 러브송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었다, 나는 이 노래를 낮게 따라 부르며 천천히 핸들을 돌린다.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자동차 뒤로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뚜둑’ 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로 만든 알림판이 쓰러진다.
그 알림판에는 이 주위 일대가 내년부터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내용과 함께 시행날짜가 적여있었다.
공사시작은 눈이 녹기 시작하는 3월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