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아서 도울 수 있었다

당신의 마음그릇은 안녕하신가요?

by 아녀녕

[가을 :제9부]



“운이 좋아서 남을 도울 수 있었다.”라는 말은 겸손하면서도 놀라운 말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 생각났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행을 베푸는지 지켜보는 몰래카메라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파지가 가득 담긴 리어카를 끌고 할머니 한 분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 중간 정도 왔을 때 때마침 신호등은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바뀌었고 리어카에 실린 파지가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자 신호를 기다리던 승용차에서 한 남성이 차에서 내렸고 할머니를 도왔다. 그런 그의 선행이 담긴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에게 사회자는 질문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고 도와주실 수 있었나요?”라고 묻자 돌아온 그의 대답은 굉장히 의외였다. “제가 오늘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도울 수 있었어요. 제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아마 다른 분들도 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도움을 주셨을 겁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칭찬을 할 일이 아니라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의 인터뷰 모습을 보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는데 지금 역시도 대단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의 마음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어떻게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말이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게 양보를 하게 되면 아쉬움을 느끼고 괜히 내가 남들보다 더 뭔가를 해야 하면 기분이 좋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면 예전과 달리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커져가고 있구나 싶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동화되어 내가 변한 것인지 각박하게 변한 내가 사회를 각박하게만 보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예전과 달리 내 마음의 온도가 미지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인데 선뜻 내키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에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 상대방이 주는 만큼 베푸는 나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실망할 때도 있다. 예전에 리어카를 끌던 할머니를 친구와 몰래 뒤에서 밀어주던 나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싶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지근한 온도를 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류시화 시인의 책 내용 한 구절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밉거나 뭔가를 양보할 때 손해 보는 느낌이 들면 전생에 나의 딸이었거나 혹은 부모였을지 모르는 상대로 보라고 말이다. 그러면 미움은 조금 사그라들고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이 된다고 말이다. 그 마음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 나도 마음에 우러나오는 친절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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