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자연의 위협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은 숭배의 대상에서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점점 바뀌게 되었다. 이를 "탈주술화(탈마법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과 닮은 존재로서 여성이 지닌 신성함도 점차 사라지고, 자연과 여성이 지니고 있었던 통제 불가능성은 부정적인 요소로 여겨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과 여성이 지닌 생성능력은 유지를 하되, 그 외의 우연적인 요소들은 제거하려는 욕망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상은 여성주의 이론이 비판하고 있는 남성 위주의 서술 방식과 일치한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른 공동체를 정복하거나 자신의 공동체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점차 심해지는 남성들의 폭력성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중요했으리라 생각된다. 남성들은 그저 힘의 원리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죽음에 대한 공포가 존재했겠지만, 살아남기 위한 공격성이 더 발달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위대한 전사들을 기리는 의식은 마음의 빚을 지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제 공동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포기한 자들을 기리고, 그들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지속을 다짐한다. 이후 사회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다른 인간들과의 여러 가지 약속이 중요해지면서, 공격성은 점차 무의식의 영역으로 억압된다. 이 공격성은 '희생제의'와 '카니발리즘'으로 해소된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극도의 고통, 남성들의 폭력, 그와 더불어 다른 공동체에서 데려온 여성과의 경쟁이라는 다중고[多重苦]를 경험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간의 문명(문화)이 발달하면서, 여성의 다양한 속성 중 오직 '출산과 육아'만이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강조(강요)되는 인구 생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여성은 분명 남성들이 결코 할 수 없는 생산을 담당하는데, 그 역할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공동체에서 버림받을 확률이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말하는 여성의 버림받음은 가부장제와는 무관하다. 출산하지 못하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전투나 수렵 능력을 상실한 남성도 공동체에서 방출되거나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추상적 사고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상태를 가정한다. 또한 인간은 본래 선하지 않다는 성악설을 가정한다).
인구가 과포화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출산이 여성의 권리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인류 초창기에 그것은 권리도 의무도 아닌 그저 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에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로, 자연과 완전한 작별을 고한 현재의 사회 시스템에서는 권리의 성격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이는 것 같다.
다른 공동체에서 데려온 여성은 그곳에 이미 살고 있던 다른 여성과의 갈등을 경험했을 것이다. 먼 과거에도 요즘 말하는 '낭만적 사랑'과 같은 감정이 존재했다고 가정했을 때에는(한 사람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낭만적 사랑'은 근대적인 발명품이다), 자신의 아이의 아버지인 남성이 다른 여성과 결합하여 아이를 갖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공동체에서 데려온 여성은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생산의 임무를 담당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날수록 자신의 존재가치가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질투'의 감정이 본능적으로 발생했지만, 그것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억눌러야만 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강한 폭력성을 지닌 남성의 보호를 받으면서 공동체 내부에서 육아와 함께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여성 자신에게도 공동체 전체에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신의 질투심이나 변덕스러움을 숨기고 공동체에 유익한 출산과 양육을 담당할 적임자임을 강조할 수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내하는 여성, 흔히 말하는 모성성을 지닌 여성인 것이다.
요컨대 위대한 어머니 여신은 선한 어머니와 공포의 어머니라는 두 대극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해 느끼는 위대함과 두려움의 감정과 생각들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점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인간 공동체에게 공포의 어머니 역시 극복 가능한 신격이 되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로 승화되었을 것이고,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각종 재해들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자연과 닮은 존재로서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지닌 생산력과 그와 결부된 변덕스러운 감정과 신체의 변화들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한 감정들은 공동체의 신체 능력을 떨어뜨리는 요소이고, 항상성을 방해하는 요소처럼 생각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공동체와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다른 여성들을 공동체 내부로 데려올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생산력은 신성하기보다 일종의 기능적인 측면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여성은 그저 아이를 낳고, 아이를 양육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는 오직 선한 어머니로서의 역할만이 중요했을 뿐, 공포의 어머니는 사라지게 된다. 공포의 어머니는 어쩌면 여성이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였지만 그것은 억눌리게 된다. 여성의 고통은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